돌체앤가바나 패션쇼는 왜 소송에 휘말렸나

오마이뉴스 | 입력 2013.07.18 11:01  

 

[오마이뉴스 신수영 기자]


세계적인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977)는 죽어서도 괴롭다.2009년부터 시작된 명품브랜드 돌체앤가바나(D & G, Dolce & Gabbana)를 둘러싼 복잡한 소송이 그 발단이다. 7월 초 합의돼 일단락된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소송에 휘말린 돌체앤가바나

2009년 가을, 돌체앤가바나는 그들의 2009·2010년 가을-겨울 콜렉션을 선보이는 패션쇼를 세기적 디바인 마리아 칼라스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기획했다. 장소도 1954년 그녀가 '노르마'를 녹음했던 곳으로 선택했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자신의 음악과 사랑에 열정적이었던 그녀의 이미지를 차용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의상을 통해 그녀를 기억해 내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또한 2010년부터 2013년까지가 작곡가 베르디(1813-1901)의 탄생 200주년 기념의 해였기에 남다른 의미 또한 있었다.



< 라트라비에타 > 공연 당시의 마리아 칼라스의 모습.

ⓒ 위키피디아공용자료실

돌체앤가바나가 선보였던 케이프와 연미복, 이브닝드레스들은 평상복으로도 분리착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실용성과 예술성 양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돌체앤가바나는 마리아 칼라스의 독사진 한 장과 1953년 1월 1일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베네치아 '라페니체'(La Fenice) 극장 신년음악회의 '라트라비아타' 포스터, 같은 극장의 1953년 베네치아 가면사육제 행사 '노르마' 포스터를 그들 의상에 인쇄해 선보였다. (마리아 칼라스는 1949년 베네치아 페니체극장에서 첫 데뷔를 했고,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 역시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라 돌체앤가바나는 그런 모든 상징성을 갖춘 페니체극장의 포스터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페니체극장 측은 자신들의 로고가 무단사용(?)되었다며 즉각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1년 뒤인 2010년 9월 23일 밀라노법정에 돌체앤가바나를 상대로 21만 유로(약 3억)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다. (그러나 극장측이 정작 원했던 건 돌체앤가바나 의상의 판매권 이익분배였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극장측은 1년간 물밑작업을 벌였으나 돌체앤가바나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은 소송을 통해 피해보상이라도 얻자는 전략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재판과정과 결과 등을 보면 그런 배경이 충분히 신빙성 있다.)

돌체앤가바나 측 주장은 이렇다.

"밀라노 패션쇼에서 소개된 의상들은 생산과 판매 이전 단계일 뿐이다. 매장에 진열도 안 된, 말그대로 소개된 의상들이기 때문에 극장측 이미지가 훼손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또한 우리들은 작업에 앞서 '마리아 칼라스 문화협회'와 계약을 맺고 협회 회장인 브루노 토지(B.Tosi)의 조언을 받아 그가 보유한 칼라스의 사진과 자료물들을 넘겨받아 사용했기 때문에 무단복제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의 법적인 모든 책임은 마리아 칼라스협회와 협회장이 져야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 칼라스에 관한 모든 로열티의 상속인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속인은 칼라스와 관련해 자신이 철저히 분리되길 원하기 때문에 자문은 물론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에서 음악수업을 쌓은 뒤 이탈리아 베네토지방에서 운명적 인연을 만나 데뷔한다. 그는 1947년 베로나 원형경기장 죠콘다공연에 참가했다가, 공연 다음날 죠반니 바티스트 메네기니(G.B.Meneghini 1896-1981)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 메네기니는 베네토지방의 유력한 재산가이자 사업가였다. 28살 연상의 메네기니는 마리아 칼라스에게 적극적인 음악후원을 약속했다.

당시 베로나공연에서 큰 빛을 못 본 마리아 칼라스는 뉴욕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한 성공야심이 강했던 그녀는 마침 메네기니의 제안을 수락하고 동거에 들어간다. 메네기니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그녀는 1949년 베네치아 페니체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로 화려하게 데뷔를 했고, 1951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도 서게 된다.(1949년 공연 이후 그녀는 메네기니와 결혼한다. )

그후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메네기니는 사업체를 정리하고 그녀의 매니저가 되어 헌신했다. 남편의 막강한 후원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녀 또한 타고난 재능과 함께 노력을 경주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도니제티, 벨리니, 베르디, 푸치니,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비스콘티, 파졸리니, 세라피니, 번슈타인, 토스카니니 등 당대의 거장들로부터 최대의 찬사를 받으며 20세기 최고의 디바로 입지를 굳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 오나시스(A.Onassis 1906-1975)와 사랑에 빠져 10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칼라스가 그의 남편 메네기니와 1950년부터 1959년 사이에 살았던 집의 모습.

ⓒ 위키피디아공동자료실

그 시기에 홀로 남은 메네기니는 3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매번 그런 그를 살려내며 칼라스를 설득코자 절절한 편지를 쓴 건 메네기니의 가정부이자 관리인이었던 엠마 브루티(E.Brutti 1910-2005)였다. 브루티는 메네기니 외에 칼라스 또한 충심으로 섬겼던 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칼라스는 끝내 이혼을 해서 오나시스 품에 안겼다. 그녀는 음악활동을 소홀히하며 결국 노래를 포기하다시피 하면서까지 그와 함께 있고자 했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그런 그녀 대신,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과 세기적 결혼을 선택하게 된다.

사랑에 배신당한 칼라스는 샌프란시스코와 도쿄 공연을 마지막으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고, 1977년 9월 16일 파리의 아파트에서 약물에 의한 심장마비 (자살설 유력 )로 숨진 채 발견된다.

칼라스, 메네기니, 브루티의 묘한 인연

인생은 때때로 참 오묘하다. 이혼시에 메네기니 재산의 반을 가져간 칼라스였지만, 그녀가 사망하자 전 남편이었던 메네기니가 법정상속인이 된다. 그러나 4년 후 메네기니 역시 숨을 거두고 그의 유언에 의해 30년간 그를 보필해 온 브루티가 단독 상속인이 된다. 결과적으로 브루티는 마리아 칼라스의 상속인도 겸하게 된 것이다. 결국 평생을 그늘에서 살아온 브루티는 71세 나이에 어마어마한 상속을 받게 된 셈이다.

칼라스와 메네기니, 두 사람의 상속인이 된 브루티는 그러나 칼라스의 여동생에게도 거액이 보장된 칼라스의 로열티 상속권의 반을 순순히 분배해준다. (기이하게도 여동생의 이름은 '재키'이고 그리스 선박주와 결혼했다.)

브루티는 조용하고 입이 무거웠다. 칼라스와 메네기니에 관한 언론 인터뷰나 방송출연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은 채 그들에 관해 함구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닌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 그렇게 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을만큼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그러다 1986년 브루티는 칼라스의 유품 상당부분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주로 악보, 의상, 가구, 서적, 편지들이었고 그 가운데 보석류는 브루티 자손들이 소유했다. 그 시기에 칼라스의 유품 손실을 안타깝게 여긴 브루노 토지(B.Tosi 1937-2012)는 유품들을 다시 거두고 모으는 일을 시작했다. 메네기니와의 친분으로 칼라스를 알게 된 그는 그녀의 은둔시기에도 우정을 계속 유지했다. 토지는 칼라스 사망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녀의 시신을 거둔 측근 가운데 한명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관련 기자로, 칼라스의 경쟁자였던 레나타 테발디와 바이얼리니스트 우토 우기 등의 홍보담당 매니저이기도 했다. 베네치아 태생인 그는 베네치아에서 데뷔한 칼라스를 특별히 흠모했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하나 둘씩 그녀의 자료와 유품들을 모아나갔다. 칼라스가 마지막 고별무대에서 입었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파란드레스와 도쿄에서의 빨간드레스를 비롯해 입생 로랑, 크리스챤 디올, 비키, 랑방 등이 칼라스를 위해 디자인한 이브닝드레스들과 공연에서의 소품들, 2007년 소더비에서 찾아낸 편지들을 비롯해 그녀의 모든 공연 팸플릿과 포스터가 바로 그러한 자료와 유품들이다.

그후 토지는 '마리아 칼라스협회'를 설립하고 해당 수집품을 전세계를 돌며 전시했다. 그의 평생 소원은 칼라스의 첫 데뷔지였던 베네치아에 상설관, 아니 작은 기념홀이라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텃세가 심하고 콧대 높은 베네치아는 망자가 된 칼라스에게 냉정했고, 그런 현실에 대해 토지는 늘 가슴아파했다.

칼라스의 유품들은 여기저기 흩어졌고, 이렇다할 기념협회도 없었던 탓에 칼라스에 관한 모든 것은 '마리아 칼라스협회'가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협회가 칼라스의 상속인과 어떠한 적법한 절차를 맺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생뚱맞게도 페니체극장이 돌체앤가바나에 소송을 걸며 로고사용권과 피해를 주장하면서 칼라스협회 또한 궁지에 몰린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돌체앤가바나측과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페니체극장 사이에서 가장 난감한 건 마리아 칼라스협회였다. 게다가 협회는 부채가 산적한 상태였다. 자칫하면 칼라스의 유품들은 법원입찰경매에 부쳐질 판이었다. 그런 가운데 토지 협회장은 2012년 가을 숨을 거둔다.

그러던 중 7월초 모든 합의가 이뤄어졌다.

돌체앤가바나 측은 극장 로고가 인쇄된 의상들을 모두 폐기처분하며 극장 측에 5만유로(약 7500만원)을 지불하고, 극장 측은 소송을 취하하는 방법을 찾은 것. 그러나 여전히 남은 문제는 마리아 칼라스협회 소유의 유품들이었다. 그런데 합의 이후 희소식이 전해졌다.

마르쪼또 파운데이션(Marzotto Foundation) 측에서 칼라스협회와 숨진 협회장의 모든 부채를 갚아주는 것은 물론 유품과 자료들을 모두 모아서 그들 소유인 비첸티노의 트리씨노 빌라(Trissino Villa)에 상설전시관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마르쪼또 파운데이션은, 펜디, 구찌 등 이탈리아 명품브랜드들을 소유한 마르쪼또 그룹 휘하의 문화, 사회복지기관으로 마르쪼또 가문의 본거지는 베네토지방이다.)

이제 마리아 칼라스는 좀 편히 잠들 수 있을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