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대상은 관료 최상층, 혼란을 두려워 말라" [송재윤의 슬픈 중국]

입력 2020.08.08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7>
◇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포르투나'의 시간

권력투쟁의 진흙창에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바뀔 수 있다. 절친했던 친구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기도 한다. 선악이 착종(錯綜)하고, 가치가 전도(顚倒)되고, 좌우가 번복(飜覆)된다. 바로 그러한 정치의 불확실성 때문에 권력투쟁에선 덕망, 실력, 지략, 용기 등 인물의 비르투(virtù)보다도 포르투나(fortuna)가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는 성격이 변덕스럽고 장난스럽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 ‘자유의지’에 따라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1966년 중공중앙의 "5.16 통지" 이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공식적으로 개시된 후 최초의 50일간은 진정 포르투나의 시간이었다.

1966년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 나붙은 1400자의 길지 않은 대자보 한 장이 "천하대란"을 일으키는 문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자보를 대표로 집필한 인물은 베이징대 철학과 중국공산당 총지부위원회 서기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였다. 그녀는 1964-65년 사회주의교육운동(이하 사청[四淸]운동) 당시 교내의 혁명투쟁에서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이다.

<1964년 전국적으로 진행된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한 장면. 부농을 비판하는 농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농촌에선 사청운동으로, 도시에선 오반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모든 과정이 이후 사청운동으로 불리웠다. 사청운동은 흔히 문화혁명의 전조로 인식된다.

◇ “베이징대는 反당·反사회주의·反마오사상의 기지”

1964년 11월 초, 중앙선전부 부(副)부장 장판스(張磐石, 1905-2000)가 이끄는 210명의 공작대(工作隊)가 베이징대학 캠퍼스에 진입한다. 이들의 임무는 바로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를 비판하는 계급투쟁의 개시였다. 이때 녜위안쯔 등 "좌파"가 선두에 나섰는데, 이들은 베이징 대학 총장이자 당서기 루핑(陸平, 1914-2002), 부서기 펑페이윈(彭珮雲, 1929- ) 등을 표적 삼아 표독하고도 집요한 계급투쟁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베이징대학이 “자본주의의 용광로"이며 "자산계급이 통치하는 학교"라는 게 그들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후 베이징 대학의 "계급투쟁"은 두 달 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장판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교 20개 장소에서 대면(對面) 투쟁이 일어나 “격렬하고, 첨예하고, 활발하고, 생동감 있게” 전개됐다. 대면 투쟁이란 크고 작은 대중집회에 반혁명의 혐의자를 잡아놓고 직접 혐의를 추공하고 단죄하는 “비투”(비판투쟁)의 인민재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녜위안쯔는 좌파투사로 급부상하지만, 역시 포르투나가 변덕을 부린다.

베이징 시장 펑전이 베이징 대학 사태에 개입한 것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루핑과 펑페이윈을 감싸고 돈 후, 베이징대학 사청운동의 과도함을 비판한다. 반격의 기회를 얻은 루핑은 1월 23, 24일 이틀 동안 공작대를 비판하면서 적극적인 자기항변을 이어간다. 마침내 2월 20일 중앙선전부의 루딩이(陸定一, 1906-1996)는 "루핑은 좋은 사람인데, 실수를 했을 뿐"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리고, 3월 3일, 덩샤오핑이 루딩이의 판단을 승인한다. 이로써 베이징 대학의 사청운동은 일단 수습되었다.

4월 29일 루딩이는 장판스가 이끄는 공작대를 해체하고, 중앙선전부 부부장 쉬리췬(許立群, 1917-2000)을 그 자리에 앉힌다. 이듬 해, 6월 29일 펑전은 베이징 대학이 “자본주의의 용광로"가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루핑을 공격하던 녜위안쯔 등 학내의 좌파세력은 이제 비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좌파는 우파로 몰리고, 우파는 다시금 좌파가 되어 극적으로 소생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1965년 출판된 “미신타파 괘도.” 벽에 걸어 놓고 보는 우화집. “신의 관념이 어떻게 나왔냐?”는 제명 아래 농촌의 인민에 사회주의적 종교관을 심어주는 계몽적 우화가 제시되어 있다. 전통적 신앙은 모두 미신이라는 마르크시즘의 종교관이 담겨 있다.

루핑은 베이징 대학의 간부, 교사 및 학생들로 구성된 공작대를 조직한다. 농촌 지역 사청운동에 그들을 파견하기 위함이었다. 녜위안쯔는 철학과 서기직을 박탈당한 채, 베이징 근교의 화이러우(懷柔)현에서 사청운동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놀랍게도 1966년 2월 이후, 펑전과 루딩이는 삼반분자의 멍에를 쓰고 추락하고 만다. 얼마 후, “5.16통지” 반포되었다. 포르투나가 녜위안쯔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펑전과 루딩이는 이미 삼반분자의 멍에를 쓰고 만신창이가 되어 직무 해제된 상태였다. 녜위안쯔로선 눈이 번쩍 뜨이는 반격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마오쩌둥의 오른팔 캉성은 와이프 차오이오우를 사주해 베이징 대학에서 문혁의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차오이오우는 베이징 대학에서 녜위안쯔와 접선한다. “5.16통지"가 정치국 확대회의를 통과해서 중공중앙의 공식노선으로 채택되자 녜위안쯔는 차이이오우과의 협의를 거쳐 곧 행동에 나선다. 녜위안쯔는 6명의 좌파들과 함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를 작성한다.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를 “반당, 반사회주의, 반마오쩌둥 사상”의 기지로 규정하는 이 대자보는 순식간에 문혁의 돌풍을 일어난다. 위협을 느낀 대학 당위는 매일 밤 회의를 열고 수천 장의 대자보를 써 붙이며 반격을 시도하지만….

 

<1966년 6월 추정. 문혁시절 대자보의 홍수

◇ 관영매체, 문화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붓다

1966년 6월 1일 마오쩌둥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를 전국의 매체를 통해 발표하라 지시하고, 그날 저녁 중앙방송은 그 사건을 대서특필한다. 곧바로 전국의 공산당 기관지들이 문화혁명의 팡파르를 불어댔다. 관영매체의 선전선동은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했다. 문혁의 광풍이 일단 불자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대학 캠퍼스가 제일 먼저 요원(燎原)으로 화(化)했다. 전국의 대학에선 좌파 학생들이 학교의 당위원회에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 최고의 명문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의 캠퍼스엔 6월 동안에만 6만5000장의 대자보가 붙었다. 상하이 선전부의 통계에 따르면, 6월 18일 이전까지 무려 8만8000 장의 대자보가 붙었고, 1390명이 반혁명세력의 낙인을 받았다. 상하이 시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6월 첫 주, 270만 명이 순식간에 문혁의 물결에 동참했다.

마오쩌둥은 이미 문화혁명의 타깃은 관료집단 내부의 최상층이라 언급한 바 있다. 마오의 교시에 따라, 대학가의 투쟁은 우선 총장, 대학간부 및 교수들을 겨냥했다. 그해 6-7월 언론은 날마다 “반혁명 흑방(黑幇)”의 발본색원을 부르짖고 있었다. 관영매체의 선전선동으로 학생들의 투쟁은 점점 더 과격한 양상으로 치달아 6월 18일 급기야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6월 21일 중공중앙 확대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무정부주의 현상은 제지돼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는데….

 

<1966년 5-6월 베이징의 최고명문대학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에서 가장 먼저 문혁의 돌풍이 일어났다. 위의 사진은 칭화대학 홍위병 비투(批鬪) 집회의 한 장면. “반동학술권위를 타도하라!”>

◇ 마오쩌둥 “이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혁명의 폭풍이야”

문혁의 화마가 캠퍼스를 덮치자 중공중앙은 기민하게 베이징의 교육 및 문화 기관 곳곳에 7239명의 대규모 공작조를 파견했다. 6월 3일부터는 지방의 당위원회도 공작조를 내보낸 상태였다. 1950년대부터 대규모 정치투쟁이 전개될 때면 중앙정부는 공작조를 파견해 “질서정연하고 합법적인” 계급투쟁을 관장하게 했다. 공작조는 대부분 퇴역 장교들과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6월 9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항주로 간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알현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중공중앙을 지도해 달라 읍소하지만, 마오는 넌지시 그 부탁을 뿌리치면서 묘한 말을 남긴다.

“문화대혁명에 관해선, 그저 손을 떼야 해. 혼란을 두려워 하지마! 손을 놓아야 군중을 격동시킬 수 있어. 크게 일을 벌일 수가 있어. 그렇게 해야 우귀사신(牛鬼蛇神, 반혁명분자의 비유)들을 모두 끌어낼 수 있어. 공작조(工作組)를 꼭 보낼 필요도 없어. 우파들의 파괴행위도 두려워 말아.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한 장으로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타오르기 시작했어. 이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혁명의 폭풍이야!”

이미 류와 덩은 투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 사실을 훤히 아는 마오는 “혼란을 두려워 말라”며 “공작조를 꼭 보낼 필요도 없다”는 말을 한다. 과연 어떤 의도였을까?

<문화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학계, 문화계, 관계, 정부기관 등 모든 단위에서 권위에 도전하는 군중의 반란이 필요하다 주장했다. 마오쩌둥이 고안한 “조반유리”와 “혁명무죄”는 그 당시 중국의 집단의식을 드러내는 문혁의 키워드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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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중앙에 반대하는 자는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변" [송재윤의 슬픈중국]

입력 2020.08.01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6>
◇ 음모와 배신, 비열과 잔인…'막장 드라마' 권력 투쟁

모든 권력투쟁은 일면 유치하다. 권력자들이야 거대 명분과 숭고한 가치로 권력투쟁의 당위를 선전하지만, 싸움의 진짜 이유는 열등의식, 공격본능 따위인 경우가 적잖다. 1960년대 중반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한 편의 막장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진부한 혁명의 구호들 대신 시기, 질투 등 인간의 어두운 파토스(pathos)가 정치투쟁의 진짜 이유일 수도 있다.

권력자들은 함정을 파고, 음모를 짜고, 배신을 일삼고, 대중을 기만한다. 명예를 걸고 정당하게 결투하는 중세의 기사도는 현실의 정치판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권력투쟁은 대부분 비열하고, 치졸하고, 지저분하고, 잔인하다. 목숨을 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면 권력자는 "도덕"의 분칠을 하고 "정의"의 가면을 쓴다. 대중은 권력자의 민낯을 절대로 볼 수가 없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가 목숨을 걸고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기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에 따르면 "불세출의 영도자" 마오쩌둥 역시 일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문화혁명의 정치투쟁은 치정(癡情)과 원한이 뒤섞인 한 편의 멜로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인간 마오쩌둥의 시기심과 증오심이 문화혁명의 직접적 동기였을 수 있다.

 

<1954년부터 22년 간 마오쩌둥의 개인 의사로 근무했던 리즈수이(李志&#32485;, 1919-1995)는 미국 망명 후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집필했다. 직접 썼다 파기했던 일기를 되살린 이 기록은 최고 권력자 마오의 섭생, 생활습관, 여자관계,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진상을 기록한 심층적 증언록이다.>

◇ 권력 놓고 ‘대리 투쟁’ 벌인 마오·린뱌오·캉성의 아내들

마오쩌둥, 린뱌오, 캉성은 모두 정치투쟁의 대리인으로 "와이프"를 전면에 내 세우거나 뒤에서 은밀히 이용했다. 마오는 펑전을 잡기 위한 계략으로 장칭을 상하이에 보내서 문단의 좌파 비평가들과 결탁시켰다. 린뱌오는 군부의 거물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을 치기 위해 예췬(葉群, 1917-1971)으로 하여금 뤄의 심복 샤오샹롱(肖向榮, 1910-1976)를 공격하게 했다. 캉성은 베이징대학에 차오이오우(曹軼歐, 1903-1989)를 밀파해서 좌익 지식인들을 규합해 문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를 작성하게 했다.

와이프을 이용한 점에선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6년 6월 왕광메이(王光美1921-2006)는 류의 뜻에 따라 공작조(工作組)를 이끌고 칭화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그녀는 홍위병 집회에 불려나가 집요하게 성적 모욕을 당했는데, 장칭(江靑, 1914-1991)의 질투 및 증오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장칭은 1930년대 상하이 은막의 스타로서 옌안에서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정부인이 된 인물이다. 장칭은 7세 연하의 미인 왕광메이가 영부인이 되어 해외순방을 다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순방 시 양장에 진주목걸이를 했다는 이유로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의 목에 탁구공 목걸이를 달고 집회에 끌고 다니며 공공연히 성적(性的) 모욕을 가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영부인 하르티니 수카르노를 접견하는 장면. 왼쪽부터 마오쩌둥, 장칭, 그리고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 왕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질시는 문혁 멜로드라마의 심리적 배경이 된다.

중공중앙 최고위 부부들은 거의 대부분 1940년대 옌안에서 만나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커플들이었다. 문혁 시절 그들이 펼친 “쌍쌍투쟁”은 숱한 가십거리를 남겼다. 1966년 5월 20일 중공중앙 확대회의에 배포된 린뱌오 명의의 문건이 단연 압권이다.

"나는 증명한다. 1. 나와 혼인할 때, 예췬은 순수한 처녀였으며 혼인 후에도 그녀는 줄곧 정조를 지켰다. 2. 예췬과 왕스웨이는 사랑한 적이 전혀 없다. 3. 라오후(老虎, 아들 리궈 [立果]의 별명)와 더우더우(豆豆, 딸 리헝[立衡]의 별명)는 모두 나와 예췬이 친자녀들이다. 4. 얜웨이빙(嚴慰冰, 1918-1986)의 반혁명적 서신에 적힌 내용은 모두 요설이다. 린뱌오, 1966년 5월 14일."

왕스웨이는 연안 시절 정풍운동에 희생당한 비운의 문인이었다. 얜웨이빙은 중앙 선전부장 루딩이의 와이프인데, 린뱌오에게 예췬의 부정한 행실을 폭로하는 수십 통의 익명 서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루딩이와 린뱌오의 대립이 부인들 사이의 지저분한 싸움으로 표출됐다는 이야기다.

문혁 당시엔 극비였으나 치정에 얽힌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이후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권력자들은 근엄한 얼굴로 정치적 비장미를 연출하지만, 대중은 권력자들의 뒤를 캐묻고 그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희화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술자리 가십은 민심의 풍향계라 여겨진다. 독재정권 아래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린뱌오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린뱌오, 린리궈, 예췬, 린리헝. 1971년 내란혐의에 연루된 린뱌오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망명하다 사망한다. 이 중 린리헝만 현재 생존해 있다.>

◇ 최고 권력자에는 반대 못하는 ‘조반유리’, 모든 반란을 진압하라는 뜻

1966년 5월 25일 베이징 대학 식당 벽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가 붙는다. 베이징대 철학과 당위원회 서기 녜위안쯔 등 7인의 서명이 붙은 대자보는 문화혁명이 대중운동으로 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개 대학의 식당 벽에 붙은 대자보 한 장이 대체 어떻게 전국적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가 있나? 물론 관영매체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베이징 시장 펑전이 숙청된 이후, 관영매체는 최고 영도자 마오쩌둥의 손아귀에 온전히 들어왔다.

6월 1일 항주에서 마오쩌둥은 문제의 대자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신화사를 통해 이 대자보의 전문을 방송하고, 전국의 모든 일간지, 주간지 등에 그대로 발표해야 하오. 그럴 필요가 십분 있소. 베이징 대학에 이런 반동의 보루가 있다면, 바로 거기서 반동의 타파를 시작할 수 있소!” 흥분한 마오쩌둥은 동시에 캉성에 전화를 걸어서 이 대자보야 말로 "1960년대 베이징공사의 선언이며, 파리코뮌보다도 그 의의가 더 크다"고 소리쳤다.

<1966년 8월 16일 톈안먼 광장에서 녜위안쯔 및 좌파인텔리들을 맞이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왼쪽 앞 단발의 안경 낀 여성이 녜위안쯔

6월 1일 중앙방송은 녜위안쯔의 대자보를 집중 조명한다. 중앙의 관영매체에 대서특필되자 지방의 모든 신문이 곧 따라왔다. 전국의 이목이 거의 동시에 베이징 대학에 나타난 한 장의 대자보에 쏠리게 되었다. 곧이어 전국의 유수 대학들과 중고교에도 대자보의 물결이 이어졌다. 그해, 6월, 비로소 마오쩌둥이 밤을 지새우며 기획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인민일보 사설엔 이런 구절이 등장했다. "마오주석에 반대하고,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고,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지시에 반대하는 모든 자는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마오쩌둥의 보위가 곧 혁명이라는 선언이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선 현대 중국의 자유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은 일갈한다.

“어떤 이는 마오가 문혁 시기 군중에게 '민주'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 사설의 필자는 '민주'에 명확한 생사(生死)의 한계선을 긋고 있다. 마오주석, 마오쩌둥 사상 및 당중앙은 절대로 반대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오로지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造反)할 수 있었다. 마오의 면전에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이 가능했다.”

문화혁명의 키워드는 단연 "조반"이었다.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며 일어난 홍위병을 향해 마오는 그 유명한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부르짖었다. 반란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조반의 사전적 의미는 "반란을 일으키다, 반역하다, 반항하다" 정도이다. 반란이란 최고 권력에 대한 저항일 때 의미가 있다.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할 수 있다면" 결국 마오의 호위무사가 되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형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주장에 가깝다. 결국 문혁 당시의 "조반"이란 1950년대 내내 진행됐던 진반(鎭反)운동 내지는 숙반(肅反)운동과 다르지 않다. 마오가 제창한 '인민민주독재'의 원칙에 따라 인민이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억압하는 것!

문제는 이 대자보가 마오의 오른팔 캉성이 와이프 차오이오우를 사주해서 만들어낸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녜위안쯔는 2010년 90세의 나이로 그 대자보가 누구의 외압도 없이 7인이 합심하여 자발적으로 작성한 자발적 격문이라 주장했지만, 1966년 초 이미 차오이오는 공작조(工作組)를 이끌고 베이징대학에 들어가 활약하고 있었다. 중공중앙이 "5.16통지"를 발표한 직후, 군중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오가 요구하고 캉성이 기획하고 차오이오우가 실행에 옮긴 "조반"의 멜로드라마였다.

 

<문혁 당시 대자보를 작성하는 베이징 사범대학의 학생들. 큰 글씨로 쓴 "폭력혁명만세!"라는 구호가 인상적이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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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자발적 저항이란 탈을 쓴 국가 주도 캠페인 [송재윤의 슬픈 중국]

입력 2020.07.25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15회>

◇ 중공 "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것" 훗날 실토

표면상 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을 보위하는 혁명군중의 자발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이란 정부에 맞서는 자발적 시민의 저항을 이른다. 과연 문화혁명이 대중운동일까? 정부가 인민을 동원했다면 국가주도의 관판(官辦) 캠페인에 불과하다.

1981년 중공중앙의 결정문에는 다음 문구가 나온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문화혁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당, 정부, 인민이 겪었던 가장 극심한 후퇴와 과도한 상실을 초래했다. 문화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중공중앙이 문화혁명을 "마오를 위한, 마오에 의한, 마오의" 캠페인으로 규정하는 대목이다. 벨기에 출신 작가 피에르 릭만스(Pierre Ryckmans, 1935-2014)는 1970-80년대 마오주의 문화혁명을 흠모하는 서구의 좌익 인텔리들을 비판하면서 일갈한바 있다. "문화혁명은 대중운동이라는 허구의 연막 속에서 치러진 권력투쟁일 뿐이었다."

여전히 큰 의문이 남는다. 마오쩌둥은 과연 어떻게 그 수많은 군중을 움직여 "천하대란"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행정의 실권에 상실한 최고영도자 마오는 과연 어떻게 "혁명적 군중"을 움직일 수 있었나? 왜 다른 지도자들은 마오처럼 대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없었나?

1960년대 중반 중국의 인구는 7억 5천만 명에 달했다. 그 거대한 대륙을 일순간 혁명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마오의 권력은 군중을 움직일 수 있는 그의 초인적 카리스마에서 나왔다. 물론 마오의 인격숭배는 정치적 선전선동의 결과다. 1940년대 초반부터 중국공산당은 마오를 구심 삼아 전일적 대중지배의 기술을 계발해 왔다. 그렇다 해도 대중이 그토록 마오를 추종하고 숭배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혁 당시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위대한 스승 마오주석에 대해선 마음에 ”충(忠)“자를 품고,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해선 격하게 ”용(用)“자를 꼭 붙들고!“



◇ 마오의 '몽상'에 대중 열광…포퓰리즘의 나락으로

마오의 카리스마는 그의 "거대한 몽상(夢想)"에서 나왔다. 그는 과격한 유토피아의 꿈을 꾸고, 대중에게 그 꿈을 실현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대약진 운동 당시 인민공사를 추진해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했건만, 마오는 코뮌의 구상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1966년 5월 7일 국방장관 린뱌오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인민공사 대신 "커다란 학교(大學校)"의 발상을 들고 나왔다.

"린뱌오 동지, 세계대전이 없는 조건 하에서 군대는 '커다란 학교'(大學校)가 되어야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이 커다란 학교는 전쟁 이외에도 다른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정치를 배우고, 군사를 배우고, 문화를 배울 수 있다. 농업 및 부업에 종사할 수 있다. 중소 규모의 공장을 세워 필요한 산품(産品)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자산계급을 비판하는 문화혁명에 수시로 참가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군학(軍學), 군농(軍農), 군공(軍工), 군민(軍民)이 모두 결합될 수 있다."

 

<“마오주석 “5.7지시”의 광휘어린 대도를 따라 용맹스럽게 전진하세!“

이 서신은 문화혁명의 정신을 담은 이른바 “5.7지시”로 널리 유포됐다. 이 문건에서 마오는 1) 사회분업의 철폐, 2)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 철폐, 3) 상품교환이 소멸된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를 지향했다. 나아가 당과 정부의 통합, 의회와 행정의 합일, 삼권의 통합을 주장했다. 심지어는 상비군 대신 각 단위의 인민의 자위적 무장을 제시하며, 지방자치의 실현까지 부르짖고 나왔다. 직종별 분업도 없고 지역적 특화도 없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의 기본단위를 조급히 달성하려는 야심적 기획이었다. 대약진의 인민공사엔 공(工), 농(農), 상(商) 학(學), 병(兵)의 다섯 직종이 공존했는데, “커다란 학교”의 구상에선 상(商)까지 배제한다.

상품경제와 화폐제도까지 부정하는 공산근본주의자의 몽상이 아닐 수 없었다. 좌우를 떠나 근대국가의 경제 상식을 전혀 모르는 과격한 무식자(ignoramus)의 궤변이었다. 대기근의 참상을 빚은 마오는 더 과격한 유토피아의 망념을 대중 앞에 제시한 셈이다.

그럼에도 "혁명군중"은 그의 몽상에 열광했다. 그들은 밤낮으로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마오가 성취한 중국혁명의 위대함에 감동받고, 마오가 제시하는 이상적 비전에 도취했다. 마오의 가르침대로 그들은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 나려 노력하는 "순수하고 우직한" 혁명분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순수와 우직 속엔 잔악한 폭력이 내포돼 있었다.

요컨대 1960년대 중반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는 마오쩌둥 사상이 쉽게 발아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土壤)이었다. 홍위병의 열정이 마오의 몽상과 공명했던 셈이다. 포퓰리즘의 꿈은 언제나 달콤하다. 대중은 그 꿈에 현혹당하고 만다. 문화혁명은 결국 포퓰리즘의 나락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홍기를 높이 들고 우리의 군대를 마오쩌둥 사상의 커다란 학교로 만들자!” “우리는 반드시 마오쩌둥의 지시를 따라 잘 싸우는 군대가 됨과 동시에 잘 공작하는 부대, 생산하는 부대가 되어야 한다. 군학(軍學), 군농(軍農), 군공(軍工), 군민(軍民)을 모두 아우르는 마오쩌둥 사상의 대학교를 만들자! 문무(文武)와 공농(工農)을 겸하는 공산주의 신인을 배양하자!”



◇ 문혁의 도화선,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

1966년 5월은 천하대란의 시작이었다. 5월 7일 마오는 린뱌오에 보낸 서신에서 "커다란 학교"의 구상을 제시한다. 중공중앙은 5월 10일 베이징 시위원회의 인원을 전격 교체한다. 곧이어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5.16통지"를 채택한다. 이로써 문혁의 기본정신은 이미 분명하게 공표됐다.

마오는 지난 6-7개월 간 당·정·군의 반혁명분자들을 송두리째 잡아들이는 촘촘한 그물을 짜고 있었다.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해서파관"을 공격해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 1902-1997)을 무릎 꿇렸다. 군부의 장악을 위해 대원수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을 숙청하고, 중앙선전부의 루딩이(陸定一, 1906-1996)와 중난하이의 정보통 양상쿤(楊尙昆, 1907-1998)도 몰아냈다. 이제 열광적인 대중의 호응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1966년 5월 25일 베이징 대학 식당의 벽에 붙은 1400자 정도의 비교적 짧은 대자보가 나붙는다. 베이징대학 철학과 당서기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 등 7인은 총장, 대학부 부부장, 베이징대 당위원회 부서기 등을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는 수정주의자"들이라 비난하고 모독한다. 이 대자보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 마오는 "파리코뮌의 선언"이라 극찬하고, 신문과 방송은 뒤따라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라 선전한다. 그 결과 이 짧은 대자보는 문혁의 도화선이 되는데….

<1966년 6월 5일자 "인민일보"는 1면에 최초의 대자보 이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의 움직임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위대한 호소에 따라 베이징 대학에서 압박당하던 무산계급 혁명파가 일어났다! 그들은 총장 루핑을 영수로 하는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통치를 뒤엎는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음모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승리를 이어가고 있다. 자산계급 보황파는 광대한 군중에 포위되어 있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공허하다. 대자보는 "전국에 장렬하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는 이때, 베이징대는 군을 믿고 미동도 없이 냉담하게 싸늘하기만 기운만 감돈다"며, "수많은 교수와 학생들의 혁명적 요구를 압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아울러 "학교의 당 조직이 지도력을 강화해 맡은 바 직무를 고수해야 한다"는 대학본부의 지시를 반혁명적이라 공격한다. 결국 중공중앙의 516통보를 지지하면서 펑전의 퇴위를 정당하다고 하는 선언이다. 마지막으로 "일체의 혁명적 지식분자들이여, 전투의 시기가 왔도다!"란 절규와 함께 유명한 세 구절의 구호로 끝을 맺는다. "당 중앙을 보위하라! 마오쩌둥 사상을 보위하라! 무산계급독재를 보위하라!"

대자보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진 녜위안쯔는 문혁기간 제5인자의 지위에 올라 혁명투사로서의 경력을 쌓지만, 1978년 4월 투옥되어 1983년 반혁명행위와 모욕죄 등으로 17년 형을 언도 받고 1986년 가석방된다. 녜위안쯔는 이후 회고록에서 이 대자보의 작성에 외부의 간섭은 전혀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다수 연구에 따르면 이 문제의 대자보는 치밀하게 기획된 문혁의 불쏘시개였다.

<1966년 6월 5일자 "인민일보"는 1면에 최초의 대자보 이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의 움직임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위대한 호소에 따라 베이징 대학에서 압박당하던 무산계급 혁명파가 일어났다! 그들은 총장 루핑을 영수로 하는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통치를 뒤엎는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음모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승리를 이어가고 있다. 자산계급 보황파는 광대한 군중에 포위되어 있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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