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결합...군중 앞세워 인민 통제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0.09.12 08:5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2회>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쥐고 텐안먼 광장에 몰려든 군중, 1967-69년 경/ https://allthatsinteresting.com/cultural-revolution#4>
좌우막론 독재정권은 군중(群衆)을 앞세워 인민(혹은 국민)을 통제한다. “군중”은 일반적으로 다수대중을 지칭하지만, 다수대중은 실체가 모호하다. 광장의 군중이 전체 인민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광장의 군중에 반대하는 밀실의 개개인이 오히려 다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독재정권은 군중을 앞세워 다수를 선점한 후, 곧 바로 다수를 내세워 인민(혹은 국민)을 사칭한다.
다수독재, 민주주의의 암흑
근대의 정치 사상가들이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와 민주주의를 결합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제창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군중지배(mob rule)는 곧 다수독재며, 다수독재는 곧 ‘민주주의’의 자멸임을 역사의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대로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아나키가 된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은 “진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혁명운동은 최악의 아나키를 낳고 말았다. 홍위병을 앞세운 인민독재는 결국 마오쩌둥 일인의 황권통치에 불과했다. 이제 마오쩌둥이 10대-20대의 청소년과 결합되는 정치적 마술쇼를 되짚어 보자.
노회한 게릴라 전사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1965년 11월 중순 홀연히 호화열차를 타고 베이징을 떠나 우한과 항주 등지의 호화빌라에서 무려 8개월을 머물렀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수도의 중난하이(中南海)에 머무는 동안 당권파의 쿠데타로 권좌에서 밀려나는 악몽에 시달렸다는 내부자의 증언도 있다. 도망치듯 남방으로 내려간 마오쩌둥이 1966년 2월 측근의 군부 장성들에 지시해 베이징의 수도방위대를 퇴각시킨 후 선양(瀋陽)의 부대를 동원해 수도를 포위하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야사(野史)의 “2월 병변설(兵變說)”도 있다.
수도를 벗어나 있던 8개월 간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권력층을 완벽하게 허물어뜨렸다. 그는 베이징 시장을 축출하고, 베이징 시위원회를 해체하고, 중앙의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다. 물론 그는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노리고 있었지만, 직접 권력투쟁의 메가폰을 잡기 보단, 그들에게 문화혁명의 지휘를 맡겼다.
1966년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50일간 류샤오치는 문혁을 지휘했다. 그는 “비판투쟁”의 현장에 대규모의 공작조를 파견했고, 그의 명령에 따라 공작조는 질서 있는 계급투쟁을 연출하려 했다. 마오가 의도했을까? 공작조와 과격분자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됐다. 대학가의 급진세력은 마오쩌둥 사상을 내걸고 “혁명은 조반”이라며 갈수록 과격한 시위를 벌이며 폭력 양상을 보였다.
<1966년 3월 25-31일 파키스탄 방문 중의 국가주석 류샤오치/ 공공부문>
6월 말부터는 류샤오치의 딸 류타오(劉濤, 1944- )가 재학하던 칭화대학에서 가장 극적인 투쟁이 전개됐다.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가 칭화대학에 공작조의 중책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칭화대학 조반파의 창끝은 결국 류샤오치를 겨누고 있었다. 그중 공정(工程) 화학과 3학년생 콰이다푸(蒯大富, 1945 - )는 칭화대학 조반파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됐다. 모욕을 느낀 류샤오치는 콰이다푸를 집중 비판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6월 24일 공작조는 콰이다푸를 비판하는 “변론회”를 열었다. 그 현장에서도 콰이다푸는 “교수대에 오르더라도 나는 혁명가임을 선포하겠노라!”는 터무니없이 대담한 자기변호로 일관했다. (현장에 있었던 중국의 저항언론인 양지성이 당시 콰이다푸의 배후에 마오쩌둥의 측근이 있었다고 의심할 정도였다.) 7월 4일 공작조는 그를 우파로 몰아 구금하는데, 7월 28일 마오쩌둥의 뜻에 따라 공작조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면서 콰이다푸는 청화대학 홍위병 대표로 태어나게 된다.
<1966년 홍위병 집회에서 연설하는 콰이다푸의 모습/ 공공부문>
마오쩌둥, 홍위병과 결합하다!
1950-60년대 내내 이념교육, 정치세뇌, 공포정치, 대중동원, 정치숙청이 이어졌다. 당시 중국의 정치적 토양은 문혁의 발아를 위한 최적 조건이었다. 그 비옥한 투쟁의 토양에서 싹튼 혁명의 맹아들이 바로 홍위병(紅衛兵)이었다. 그들은 여릿한 뇌수의 청소년들이었지만, 일단 사회주의 혁명 투사의 완장을 차고 나선 잔인한 집단 광기에 휩싸였다. 그들이 내면에 잠복된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마오쩌둥이 홍위병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7월 16일 마오쩌둥은 양쯔강에서 수영대회에 참석해 큰 강의 급류를 따라 16킬로미터를 떠다니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틀 후 8개월 만에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7월 24일-26일, 마오쩌둥은 작심한 듯 공작조의 파견을 큰 잘못이라 비판했고, 7월 28일 공작조의 전면적 철수를 명령했다. 곧 이어 8월 1일부터 개최된 중공중앙 11차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의 공작조 파견은 “부르주아지의 편에 서서 무산계급의 혁명을 탄압한” 행위라고 비판한다. 류샤오치는 이미 실권을 잃고 그로기 상태에 내몰렸다.
비틀거리는 류샤오치를 더 코나로 몰기 위함이었을까? 마오는 회의 현장에 자신이 홍위병 조직에 보낸 서신을 복사해서 배포하게 했다. 7월 28일 칭화대학 부속중등학교의 홍위병 조직은 마오쩌둥에 “무산계급 혁명 조반 정신 만세!” (1, 2) 두 장의 대자보를 보냈다. 제1 대자보 (1966.6.24.)의 핵심 테제는 “조반유리”였다. 제2 대자보(1966.7.2.)의 핵심 테제는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라는 이른바 사구(四舊)의 완전한 소멸이었다. 대자보를 읽고 난 마오쩌둥은 홍위병에 처음으로 답신을 보냈다.
“그대들은 6월 24일과 7월 4일 두 장의 대자보를 통해서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분자 및 혁명파를 착취하고 억압한 지주계급, 자산계급, 제국주의, 수정주의 및 그들의 주구를 향해 분노와 비난을 표출했으며, 반동파에 대한 ‘반란이 정당함’(造反有理)을 설명했다. 이에 나는 그대들에 열렬한 지지를 표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다. 무산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넘어 인류 전체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전 인류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무산계급 스스로도 결국 해방을 얻지 못한다. 동지들이여! 이 도리를 주의하라!”
마오의 답신이 아직 공개되기 전 청화대학 부속중등학교 홍위병들이 제3대자보(1966.7.27.)를 작성했다. 마오주석을 향한 어린 학생들의 존경심이 혁명적 전투의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오쩌둥에 열광하는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우리들은 마오주석의 가장 충실한 홍위병이다! 마오주석께 무한 충성하며, 가장 견결히, 가장 용감히, 가장 충실히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최고지시를 집행해야만 한다. ‘조반(造反)!’이라는 마오주석의 최고지시를! 조반은 무산계급 혁명의 전통이다. 홍위병이 계승하고 발양해야 할 전통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반란을 일으켰고, 현재에도 반란을 일으키고, 장래에도 계속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계급과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반란을 일으킨다. 모순이 존재하는 한, 반란을 일으킨다. 혁명적 조반정신은 1백년, 1천년, 1만년, 1억년 동안 계속 필요하다.... 홍위병 전사여,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끝까지 밀고 나가자! 위를 우러러 보며 앞으로 나아가자! 혁명의 대폭풍이 더욱 맹렬히 몰아치도록! 무산계급 혁명조반 정신 만세! 만만세!”
요컨대 마오쩌둥은 “조반유리”라는 한 마디로 홍위병들과 일심동체로 결합됐다. 홍위병들은 “조반유리”의 깃발을 들고 “대반란”의 광열(狂熱)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980년 중공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6년 8월-9월 베이징에서만 3만3695호가 털리고, 8만5196호의 가정이 축출되고, 1772명이 홍위병에 맞아 죽는 이른바 “홍팔월(紅八月)”의 서막이 올랐다. <계속>
<“마오쩌둥의 커다란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혁명무죄 조반유리!” “자산계급 반동노선과 당내에 자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소수의 당권파를 향해 맹렬해 불을 지르자!”/ chineseposters.net>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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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영도자의 독선, 재앙적 파멸을 부른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조선일보
입력 2020.09.05 08:56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1회>
권력자의 독단(獨斷, dogma)은 나라를 망친다. 지도자의 독선(獨善)은 사회를 해친다. 독단은 오도된 자기 확신에서 나온다. 독선은 정신병적 유아론(唯我主義, solipsism)의 발로다. 경험이 짧고 견문이 좁은 인간은 독단의 우물 속에 머무른다. 사상의 다양성,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독선의 늪에 빠져든다. 범부의 독단, 필부의 독선도 위험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수억 인구의 비대한 대륙국가 최상권력자의 독단, 최고영도자의 독선임에랴.
파멸을 부른 최고 영도자의 독단
1949년부터 1976년까지 27년 동안 마오쩌둥의 절대주의 통치 아래서 수천만이 희생되고 1억 1천만 명 이상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인류사 최장(最長)의 문명을 창건하고 확산해 온 중화대륙에 왜 그토록 처참한 재앙이 발생했나? 절대 권력자의 독단, 최고 영도자의 독선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엽 스스로 “역사의 합법칙성”을 밝혀냈다고 확신했던 독단론자였다. 그가 제창한 “과학적 사회주의”는 소외된 “무산계급”에 유토피아의 희망을 주었지만, 돌이켜 보면 공산주의는 “인민의 아편”일 뿐이었다. 20세기 모든 사회주의 정권은 관료행정의 부패와 빈곤의 트랩에 빠져 처참하게 실패했다. 20세기 공산전체주의 정권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1억 명을 초과한다. 공산정권의 실패는 마르크스의 이념적 독단에 기인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 chineseposters.net>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물사관은 젊은 마오쩌둥의 뇌리에 무서운 독단의 씨앗을 뿌렸다. 과도한 집산화로 최대 4500만이 아사하는 대기근을 초래한 후에도 마오쩌둥은 “자나 깨나 계급투쟁”을 외치며 전 중국을 혁명의 광열 속에 몰아넣었다.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기치를 높이 들고 만신창이 중국인민을 다독이며 말했다. 바닥이 미끄러운 “돌을 발로 살살 밟으며 강을 건너자!(摸着石頭過河)”고. 중국이 오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현실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계급투쟁 대신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새 시대의 모토가 되었다. 그 간단한 실용의 지혜를 얻기 위해 전 중국이 실로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상하이 양푸(楊浦)구 수앙양(雙陽)로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1950년대의 벽화 http://www.globaltimes.cn/content/979982.shtml>
문화혁명의 국제적 배경: 마오쩌둥 사상의 수출
마오쩌둥은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을 이어 사회주의 혁명의 구루(guru)가 되려 했다. 1966년 8월 초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저작선”을 대량으로 출판·유통하기로 결정한다. ‘마오쩌둥 사상’을 널리 보급하고 확산하기 위함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쩌둥이 스스로 고안하고 제창한 정치, 군사, 경제이론의 체계를 이르는데, 중공정부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공산주의 신상품을 전 세계 사회주의권에 수출하려 했다. 그 배경에는 반미(反美)제국주의와 반소(反蘇)수정주의가 깔려 있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1966년 여름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됐다. 그해 5월 세 명의 승려가 반미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한다. 5월 말 미군사상자가 최고조에 달하자 미국의 존슨대통령이 전면전을 선포하고, 6월 말 미 공군은 최초로 북베트남의 주요도시를 공습해 정유시설을 파괴한다. 한편 소련은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이후 알렉세이 코시긴(Alexei Kosygin, 1904-1980)의 지도 아래 이윤동기와 상품판매를 골자로 하는 탈(脫)스탈린 수정주의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소련의 수정주의노선을 비판했다. 언론은 날마다 베트남 전쟁의 실황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미제(美帝)를 규탄하기에 여념 없던 시절이었다. 중공중앙은 또한 사회주의의 정도를 이탈한 소련공산당을 향한 비판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예컨대 1966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의 공동성명엔 “소련수정주의자들은 세계혁명의 반역도당”이란 선언이 담길 정도였다.
문화혁명의 밑바탕엔 중국만이 세계혁명을 주도할 수 있으며, “마오쩌둥 사상이 세계혁명의 지도이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자국중심의 몽환적인 현실인식과 일인숭배의 종교적 광열이지만, 문혁 초기 전국에서 일어난 홍위병들은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마오쩌둥 사상”을 흡입했다.
“마오쩌둥 사상을 보위하라!”
국방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는 1966년 3월 11일 “공업·교통의 전선에서 마오주석의 저작을 공부하고 활용하자”는 제목의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나라는 위대한 무산계급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다. 7억의 인구가 있으니 반드시 통일의 사상, 혁명의 사상, 올바른 사상이 필요한데, 바로 마오쩌둥 사상이 그것이다. 이 사상이 있기에 왕성한 혁명의 에너지를 견지할 수 있으며, 올바른 정치의 방향을 확정할 수 있다. ······ 마오쩌둥 사상은 노동인민이 자발적으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마오주석이 직접 위대한 혁명 실천의 기초 위에서 천재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또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경험을 종합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첨단의 새로운 단계로 제고한 것이다.”
<“마오쩌둥 사상의 태양빛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도로를 비추네!” 1966년 8월, “상하이 인민미술 출판사 선전 화가 조직” 작품. chineseposters.net>
린뱌오는 문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인민해방군에서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까지 자체 개발해서 100년의 국치를 씻고 소련에 필적하는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한 직후였다. 린뱌오는 이제 중국이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최첨단의 혁명이념을 통해 세계혁명의 주도국이 돼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이 소련을 제치고 세계혁명의 지도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불가분의 정신적 무기였다. 위의 글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 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넘어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새로운 단계라 선전하고 있는 까닭이다.
<1966년 여름, “마오주석 어록”을 손에 들고 행진하고 있는 어린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곧 이어 어린 학생들이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라!”는 린뱌오의 당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66년 5월 29일 청화대학 부속중학(중고교)에서 최초의 홍위병이 결성되었다. 그날 교내에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 “마오쩌둥 사상의 절대권위를 특별히 사수해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곧 홍위병 조직의 전국적 발흥으로 이어졌다.
6월 초, 베이징지질학원(=대학) 부속 중고교, 베이징석유학원 부속중고교, 북경 대학 부속중고교, 베이징광업학원 부속중고교 및 베이징 제25중고교의 학생들이 연이어 홍위병, 홍기(紅旗), 동풍(東風) 등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이들의 선언문엔 다음 구절이 포함돼 있다.
“우리는 홍색 정권을 보위하는 위병(衛兵)들이다. 중공중앙과 마오주석은 우리들의 큰 산이다. 전 인류의 해방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책임이다. 마오쩌둥 사상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의 최고 지침이다. 우리는 선언한다. 중공중앙을 보위하고, 위대한 영도자 마오주석을 보위하기 위해 우리는 견결하게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흘릴 것이다.”
마오쩌둥 사상은 7억 인구를 하나로 묶는 “통일의 사상, 혁명의 사상, 올바른 사상”이었나? 1966년 6월 21일 인민일보 제1면 오른쪽 상단 “마오쩌둥 어록” 박스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올바른 정치 관념이 없다면,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여기서 올바른 정치 관념이란 물론 마오쩌둥 사상을 이른다. 최상 권력자의 독단, 최고 영도자의 독선이 어린 학생들의 뇌수를 파고드는 과정은 그러했다. 절대 권력자의 독단, 최고 영도자의 독선은 이제 7억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유일사상이 되었다. <계속>
<1966년 6월 15일자 인민일보 1면 상단. 우측 박스에는 마오주석의 어록 중 한 구절이 발췌돼 있다. “올바른 정치 관념이 없다면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20> 편가르기와 흑백논리로 인민을 장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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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가르기와 흑백논리로 인민을 장악하라 [송재윤의 슬픈 중국]
입력 2020.08.29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20>
“편가르기”는 정치투쟁의 기본이다. 위기에 봉착하면 위정자들은 흔히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서 싸움을 붙인다.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대세력을 제압하려는 진부한 꼼수지만, 정치투쟁에서 그보다 더 효율적인 대중동원의 수단은 없다. 국민의 분열을 위해 그들은 어김없이 이분법과 흑백논리를 구사한다. 대부분 거짓선동과 흑색선전임에도 그 파괴력은 막강하다. 생업에 바쁜 군중은 쉽게 반복적으로 이분법의 트릭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 전체주의 정권의 이분법과 흑백논리
1949년 건국 이후 중공정부는 바이러스 퇴치하듯 인민의 의식을 소독해왔다. 인민의 의식에서 부르주아 잔재, 자유주의의 유혹, 자산계급의 유습을 도려내 세척한다는 발상이었다. 의식의 세척과 소독을 위해서도 역시 이분법과 흑백논리가 최고의 효력을 발휘한다. 혁명/반혁명, 무산계급/자산계급, 민족/반민족, 민주/반민주, 친일/반일, 친미/반미, 반제국주의/친제국주의, 친수정주의/반수정주의 등등.
<“염념(念念)불망 계급투쟁!” “계급투쟁을 통해 특정 계급이 승리하고 특정 계급이 온 천하를 뒤덮는다. 이것이 바로 역사이고, 이것이 바로 수천 년의 문명사이다. 모택동”
1953년 마오쩌둥은 전체 인구를 95% 인민과 5%의 적인(敵人)을 나눈 바 있다. 문혁 당시에도 총인구의 5% 정도가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이라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분법은 소수에 대한 다수독재의 논리를 깔고 있었다. 다수의 혁명대중이 소수의 반당·반사회주의 세력을 독초 뽑듯 제거해야 한다는 이른바 “인민민주독재”의 발상이었다.
자유와 권리의 주장은 “제국주의자의 음모”로, 전통적 가치의 표출은 “착취계급의 봉건적 유습”으로, 동정심 따위 감정은 불순한 “부르주아 인도주의”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이분법과 흑백논리로 세뇌된 “혁명군중”이 없었다면, 문혁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
<문혁 당시의 비투 장면.
◇ 인민일보 “우귀사신(牛鬼蛇神)을 모두 쓸어버려라!”
1966년 5월 26일 베이징 대학에 마오쩌둥이 극찬한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가 나붙은 후, 중국의 대학가 및 중고교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 이어 1966년 6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1면 톱에 실린 “우귀사신(牛鬼蛇神, 반혁명분자의 폄칭)을 모두 쓸어버리라!”는 제명의 사설은 문혁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고조(高潮)가 이제 세계 인구 4분의 1의 사회주의 중국에서 흥기하고 있다!”는 격앙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사설은 공·농·병 “수억 명의 혁명적 군중을” 향해 “마오쩌둥 사상을 무기삼아 사상문화의 진지에 똬리 튼 다수의 우귀사신을 쓸어버릴 것”을 촉구한다. “혁명의 근본 문제는 정권의 문제”이며, “이데올로기, 종교, 예술, 법률, 정권” 등 이른바 상부구조에서 핵심은 바로 정권(政權)이라 규정하면서 사설은 “정권을 얻으면 일체를 얻고, 정권을 잃으면 일체를 상실한다”며 혁명군중의 총궐기를 촉구했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 제 1면 사설. “일체의 우귀사신을 쓸어버리자!”>
1965년 겨울까지만 해도 ‘인민일보’의 편집진은 “백가쟁명 백화제방”을 부르짖으며 사상의 다양성과 학술논쟁의 중립성을 옹호하던 베이징 시장 펑전의 지휘를 따르고 있었다. 그해 봄 펑전이 축출된 후 ‘인민일보’의 편집권은 마오쩌둥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였다. 날마다 모든 지면엔 마오쩌둥을 보위하고 칭송하고 절대시하는 인격숭배의 기사로 도배되었다. ‘인민일보’는 마오의, 마오를 위한, 마오의 기관지로 변질되었다. 1966년 6월 2일자부터 매일같이 ‘인민일보’ 제1면 우측 맨 위의 작은 박스에 “마오쩌둥 어록”이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하루도 끊임없이 마오 사후 1년 반이나 지난 1978년 3월 25일까지 지속됐을 정도였다.
<1966년 6월 2일자부터 1978년 3월 25일까지 “인민일보”는 우측 상단에 매일 마오쩌둥 어록을 게재했다.>
류샤오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혁명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마오쩌둥사상을 보위하는 대규모의계급투쟁이며 체제전쟁임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50일 동안 류샤오치는 국가원수로서 문화혁명을 총지휘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베이징을 떠나 있던 마오쩌둥은 비밀 채널을 통해 날마다 베이징의 상황을 보고 받고만 있었다. 게릴라 전술의 마스터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등 당권파를 몰아내기 위해 “편 가르기”와 “좌우 뒤집기”의 전술을 구사한다.
◇ 류사오치, 폭력 행위에 강경 대처
1966년 6월 초, 베이징의 대학가와 중고교는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있었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사회 곳곳에 암약하는 자산계급 반혁명세력과 일대의 계급투쟁을 치러야만 하는 전시상황이 펼쳐졌다.
6월 중순, 중공중앙은 “문화혁명의 철저한 이행과 교육제도의 철저한 개혁을 위해 마오쩌둥의 지시와 군중의 요구에 따라” 신입생의 선발을 반년 늦추는 조치까지 취한다. 정규 과정이 마비된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는 혁명의 “난투난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급기야 6월 18일 베이징 대학에서 과격분자들의 폭력행위가 터져 나왔다.
류샤오치는 한시바삐 문혁의 혼란을 수습하고 경제개혁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미 경제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생산량은 목표치 미달이었고, 산업재해는 증가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대규모 공작조의 파견밖엔 없었다. 당시 중공중앙의 당권파들은 1957-59 반우파투쟁 때처럼 중공중앙이 대규모의 정치 캠페인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공작조는 캠퍼스에서 자행되는 “난투난동”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른바 반간요(反干擾, 소요행위 반대)가 공작조의 기본노선이 되었다.
◇ 마오 "류사오치가 혁명 군중을 억압했다"
1966년 6월 9일, 류샤오치의 지시에 따라 513명의 공작조가 칭화대학 캠퍼스에 진입했다. 당시 칭화대학엔 이미 문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캠퍼스는 온통 대자보 홍수였다. 주로 칭화대학 당위(黨委, 공산당위원회)의 부패를 폭로하고 교수들의 죄행을 지적하는 내용이 주였다. 베이징 시위원회를 비판하는 대자보도 있었으며, 그해 봄 파면되고 추락한 펑·루·뤄·양(彭陸羅楊) 네 명의 반혁명분자들을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베이징대학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칭화대학의 당서기 겸 총장 장난상(蔣南翔, 1913-1988)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하고 수정주의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칭화대학의 당위원회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비판을 제약했고, 격분한 학생들은 공격의 수위를 높여만 갔다.
1966넌 6-7월 류샤오치의 특명을 받은 공작조는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1957-59년의 “반우파투쟁”을 재현한다. 공작조는 교수 및 학생 중에서 과격분자들을 색출해서 반혁명 우파의 멍에를 씌웠다. 공작조는 질서를 어기지 않는 합법적 권력투쟁을 실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과격분자들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그해 6-7월,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공작조는 무려 700여 명의 반혁명분자를 색출했다. 공작조의 취조에 못이긴 자공과(自控科)의 젊은 교수 스밍위안(史明遠)은 압박을 못 이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칭화대학의 학생들은 더욱 강경한 노선을 취한다. 마침내 공작조와 과격분자들의 갈등은 격렬한 내부의 투쟁으로 비화되는데….
7월 중순 마침내 베이징에 복귀한 마오쩌둥은 곧 바로 “혁명 군중을 억압한” 류샤오치를 문책하기 시작한다. 류샤오치는 혁명군중을 억압한 반동분자로 몰릴 위기에 봉착했다. 당권파와 혁명군중을 분열시킨 후, 순식간에 공수를 뒤바꾸는 마오의 “편 가르기”와 “좌우 뒤집기” 전술이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혁명수정주의 흑색 노선을 철저히 제압하고 타도하자!” 마오쩌둥은 1966년 여름 이미 “혁명무죄 조반유리”의 구호를 내걸고 당권파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겨냥하고 있었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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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 폭력 옹호한 마오쩌둥 "혁명은 폭동이다"[송재윤의 슬픈 중국]
입력 2020.08.22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9>
혁명의 시대엔 불의(不意)의 공습(空襲)처럼 무차별 말[言語]의 폭탄이 떨어진다. 그 폭탄을 맞으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 가벼운 찰과상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제대로 맞으면 사망에 이른다. 1978년 12월 중공중앙의 발표에 의하면 문혁 “10년의 대동란” 과정에서 무려 1억 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정치적 타격의 양상은 복잡다단하지만, 피해자는 모두 공통적으로 언어의 폭격을 맞았다. 2020년 오늘도 “말의 폭탄”은 날마다 터진다.
언어중추의 발전은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적 특징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호모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이다. 인간은 언어로 세상을 인식하고,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바꾼다. 언어는 인류문명의 핵심이지만, 치명적 한계이기도 하다. “산(山)”의 실체는 “산”의 이름보다 한없이 크다. 산을 산이라 부르는 순간, 산을 안다 여긴다면 심대한 착각이다. 선방(禪房)의 경구처럼 “산은 산이지만, 산은 또 산이 아니다.” 일찍이 언어의 속임수에 빠진 어리석은 자들을 향해 노자(老子)가 말했다. “지자(知者)는 불언(不言)하고, 언자(言者)는 부지(不知)하다.”
<문혁 당시의 전형적인 비투(批鬪) 장면. 투쟁 대상의 목에 ‘이름’을 붙이고 적대적 투쟁을 이어가는 혁명 군중
◇ 정치투쟁은 ‘마타도어’… 상대를 악으로 모는 수법
혁명의 시대엔 언어적 착오(錯誤)가 인간세(人間世)를 지배한다. 정치투쟁의 기본은 마타도어(matador)다. 반대자에 "나쁜 이름"을 들씌워 악인으로 몰아가는 야비한 수법이지만, 인간은 실체와 이름을 쉽게 혼동하기에 정치꾼들은 그 틈을 파고 든다. 누군가 제 아무리 위대한 성취를 이뤘다 해도 흔해빠진 정치적 낙인만으로 그 개인의 인격을 파괴하고 정치적 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굴곡을 거쳐 온 인간 개개인의 정체가 고작 반혁명분자, 수정주의자 따위 단순한 오명(汚名)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반혁명분자"라는 주어엔 이미 "자산계급 대변자," "국민당 잔당," "제국주의 부역자" 등등의 술어가 줄줄이 내포돼 있다. 누군가 반혁명분자의 낙인을 받으면 항변의 기회도 없이 "제거돼야만 하는" "인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문혁시절 어린 홍위병들은 사방에서 잡아 온 "반혁명분자들"을 무릎 꿇리고 팔을 뒤로 꺾어 제압한 후, 얼굴에 침을 뱉으며 독침 같은 말의 폭탄을 쏟아냈다. 反당, 反사회주의, 反마오쩌둥사상, 反마오주석, 자산계급 대변자, 제국주의 주구 등등. 그 단어 하나하나가 그들의 과격한 행동을 정당화했다. 요컨대 문화혁명의 폭력성은 언어의 속임수에서 발생했다. 혁명의 말장난에 전 인민이 속수무책으로 놀아났던 셈이다.
<문혁 당시 사형에 처해지는 “반혁명 집단 주범”들의 모습. X자 쳐진 이름자 밑에 “사형에 처한다. 즉시 집행!”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 언어의 속임수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난 인민들
문혁 초기의 일례를 살펴보자. 1966년 6월 15일 난징의 신화사(新華社)는 난징(南京)대학에서 발생한 한 사건을 보도한다. 다음 날 베이징의 인민일보에 게재되면서 전국에 알려진 기사다. 베이징대학에서 불기 시작한 문화혁명의 광풍이 전국 전역에 몰아치던 시점이었다. 1966년 6월 1일 중공 인민방송국에서 베이징 대학의 7인이 작성한 최초의 대자보에 대해 보도한 직후, 6월 2일 오후 난징대학엔 베이징대학에 호응하는 대자보가 붙었는데….
베이징 대학과 마찬가지로 난징대학의 혁명사생(革命師生, 교수와 학생)들은 "반당반사회주의의 반혁명분자" 쾅야밍(匡亞明, 1906-1996)의 "반동적 죄행"을 적발하고 단죄했다. 쾅야민은 난징대학 당위원회 제1서기이자 총장이었는데, "야비(野卑)하고 비루(鄙陋)하고 독랄(毒辣)한 음모적 수단으로 교내 혁명군중의 운동을 진압하고 반당·반사회주의의 반혁명노선으로 나아갔다"는 혐의를 썼다. 대자보는 또 쾅야밍이 문화혁명을 배반했다고 집중 공격했는데, 그 근거는 난징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했던 1930년대 좌파문학 관련 서적이었다.
<총장 쾅야밍을 공격하는 난징대학의 대자보
쾅야민이 그 책에서 "학술대토론에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원칙을 강조"했다는 이유였다. 1965년 12월 베이징 시장 펑전은 "학술토론"과 "실사구시"를 근거로 역사학자 우한을 변호했었다. 난징대학의 혁명사생들은 바로 그 점을 적시하여 쾅야민 총장을 베이징의 반혁명세력과 연계된 "철두철미한 수정주의자"로 몰고 갔다. 게다가 그가 "무의식"과 "객관성" 등 서구 자산계급의 철학 개념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반당·반사회주의 흑색노선의 옹호자"라 비난했다. 쾅야민은 또 "자산계급의 대표적 존엄"이자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얼굴"이란 오명도 써야 했다. 그가 혁명사생에 "모멸, 저주, 협박을 가하면서" "광적인 반혁명활동을 전개했다"는 인신공격도 이어졌다.
쾅야민이 맞았던 말의 화살을 열거해 보면…. 반당분자, 반사회주의분자, 반동분자, 반혁명분자, 흑방, 흑선(흑색노선) 수정주의자, 자산계급의 대표, 보황파의 얼굴, 우귀사신(牛鬼蛇神, 소머리 뱀 몸뚱이의 귀신) 등등이 있다. 그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독전(毒箭)이었지만, 그때까진 그래도 "말의 화살"일 뿐이었다. 문혁 최초의 본격적인 폭력투쟁은 불과 이틀 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났다.
◇ 언어폭력에서 신체폭력으로…성범죄도 저질러
1968년 6월 18일 베이징 대학에서 최초의 폭력적 혁명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베이징 대학에 파견된 공작조는 신속히 "난투 상황"을 수습한 후, 현장의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중공중앙에 올린다.
이 보고에 따르면, 6월 18일 오전 9시에서 11시 공작조가 전체회의를 하는 사이 베이징 대학 교정에선 화학과, 생물학과 등의 여러 단위에서 "난투(亂鬪)의 현상"이 벌어졌다. 대략 40-60여 명에 대한 폭력적인 비투(批鬪, 비판투쟁)가 발생했다. 과격분자들은 교내에 흑방(黑幇)분자들을 처벌하는 투귀대(鬪鬼臺)와 참요대(斬妖臺) 등을 설치한 후, 교내 주요 책임자들, 당 간부들, 교수들, 반동학생들에 대한 비투(批鬪, 비판투쟁)를 거행했다. 면상에 흑칠하기, 긴 모자 씌우기, 무릎 꿇리기, 옷 찢기, 주먹으로 때리기, 발로 차기, 유가(遊街, 가두행진), 유투(遊鬪, 가두 비투) 등등의 폭력행위가 자행되었다.
가해자 중에는 깡패, 부랑아도 있었고, 신원을 속이고 혁명대오에 잠입한 국민당원과 베이징대학 부속 고교 퇴학생도 섞여 있었다. 베이징 대학 학생들 중에도 영웅심에 빠져 폭력을 휘두른 극렬분자도 있었다. 그들은 투쟁 대상에 대한 폭력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가슴을 주무르고, 엉덩이를 때리고, 음부를 만지는 등" 성범죄도 저질렀다.
<문혁 시기, 베이징대학 부속 고교에서 학생들이 교장을 비투하는 모습
공작조는 바로 현장에 달려가 이들의 “난타난투”를 중단시킨 후, “진정한 좌파의 혁명 행동”을 촉구했다. “무산계급 혁명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의 투쟁은 공작조의 비준을 받아야 하며, 소수 극렬분자에 의한 난동(亂動)은 반혁명으로 간주한다는 엄격한 규정을 제시했다.
규율과 질서를 지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문화혁명이 과연 가능할까? 중공중앙의 당권파들은 비폭력의 합법적 계급투쟁을 강조했다. 특히 류샤오치는 6.18 사건에 관한 베이징 대학 공작조의 보고서를 "간보(簡報)" 형식으로 전국에 배포했다. 극렬분자의 과격행위를 제어하기 위한 선제조치였다.
물론 마오는 류샤오치의 조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40년 전 출세작 "후난 농민운동 고찰보고"에서 마오는 말한 바 있었다. "혁명은 폭동이다(革命是暴動)!"
<문혁 당시의 포스터. “무산계급 혁명 조반파는 연합하라!” “혁명 조반정신 만세!”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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