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를 “계몽군주”라 숭배했던.. 홍위병들이 부른 파멸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0.10.03 08:59

 

 

 

 

 

<“마오주석은 세계 인민의 마음속 가장 붉고도 붉은 홍태양!” 광저우 미술학원 혁명위원회, 1969년 선전화>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5>

2020년 바로 오늘날도 전체주의 폭압정권의 세습전제군주를 “계몽군주”라 칭송하는 시대착오적 ‘지식분자’가 남아 있다. 20세기 인류는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김일성, 폴 포트 등의 전체주의 정권을 경험했다. 이들 전체주의 정권은 공통적으로 인권유린, 인격숭배, 사상통제, 언론검열, 국가 테러리즘의 양상을 보였다. 이에 덧붙여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2차 대전 직후 “전체주의의 기원”을 밝히면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생명은 바로 열광적인 군중(masses)의 지지라고 분석했다.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독재자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로 점철된 이들의 통치는 18세기 계몽주의의 합리성을 조롱하는 반(反)이성의 극치였다. / 공공부문>

전체주의 정권의 궤변론자들

마오쩌둥의 전체주의 역시 열광적인 군중의 지지 위에서 실현됐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왕리(王力, 1921-1996), 관펑(關鋒, 1919-2005), 치번위(戚本禹, 1931-2016) 등 3대 필간자(筆杆子, 붓대, 문인)라 불리던 극좌의 ‘지식분자’들은 마오쩌둥이 인민을 계몽하고 영도하는 “불세출의 영묘한 수령”이라 칭송했다. 권력의 정당성을 고작 한 개인의 “영웅적인” 카리스마에서 찾는 허술한 논변이다.

정상적인 문명사회에서 그런 몰상식한 궤변을 설파하는 ‘지식분자’는 사회적 매장을 면할 수 없을 테지만, 1960년대 중국에선 그 허술한 논변이 마술적인 집단최면의 효과를 발휘했다. 마오를 절대의 “계몽군주”로 숭배하는 군중의 광열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파괴하고 가족윤리를 해체하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의 모친을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총살시킨 한 홍위병의 참회가 당시의 상황을 웅변한다.

<“만물은 태양에 의지해서 생장한다!” 1970년대 초반, 셰즈가오(謝志高)와 후전위(胡振宇)의 작품. 상하이인민출판사. 마오쩌둥을 태양에 비유하는 문혁 시절의 인격숭배는 김일성을 태양으로 떠받드는 북한의 인격숭배에서 그대로 답습된다. / chineseposters.net>

마오쩌둥의 뜻을 받드는 홍위병들

1966년 8월 18일 쑹빈빈은 톈안먼 성루에서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왼쪽 위팔에 홍위병 수장을 달아주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만 17세의 쑹빈빈은 베이징 사범대학 부속 여중 홍위병 조직의 부주석이었다. 쑹빈빈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군 출신으로 1980-90년대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쑹런치웅(宋任窮, 1909-2005)의 딸이었다. 쏭빈빈이 전국 홍위병의 대표가 되어 “백만 군중” 앞에서 마오쩌둥에 홍위병의 수장을 달 수 있었던 데는 중국공산당 내부의 “꽌시(關係)”가 작용했다.

바로 다음 날 (1966. 8.19.) 베이징의 ‘인민일보’는 제1면에 홍위병의 수장을 단 마오쩌둥의 사진과 함께 톈안먼 광장의 백만군중 집회를 대서특필했다.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막 생겨나던 홍위병 조직의 성원들은 직접 홍위병 수장을 하고 있는 마오쩌둥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감동의 도가니에 빨려들었다. 최고영도자 마오주석이 직접 어린 홍위병들을 향해 바로 그들이 혁명의 주체임을 확인시켜줬기 때문이었다.

<1966년 8월 19일자 “인민일보” 제1면 (왼쪽). 쑹야오우란 이름으로 게재된 쑹빈빈의 칼럼(오른쪽)>

1966. 8월 21일 자 ‘인민일보’에는 그날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의 팔에 수장을 달아 준 쑹빈빈의 칼럼 “내가 마오주석께 수장을 달아드렸다”가 게재됐는데, 본명 대신 쑹야오우(宋要武)란 새 이름을 걸고 있었다. 지난 회 언급했듯 바로 그날 마오쩌둥은 쑹빈빈에게 이름을 묻고는 “야오우마(要武嘛, 무가 필요하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쑹빈빈이 마오의 뜻을 받아 쑹야오우로 개명했다는 사실은 전국의 홍위병의 심장에 다시금 불을 지르는 계기였다.

어머니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죽게한 홍위병

당시 안후이성 구전(固鎭)현에서 소학교를 막 졸업한 12세의 한 소년은 “쑹야오우”의 혁명정신에 큰 자극을 받았다. 소년은 즉시 본명을 버리고 장홍빙(張紅兵)으로 개명했다. 붉은 병정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3년 6개월 후, 1970년 2월 13일 밤, 16세의 홍위병 장홍빙은 모친 팡중모(方忠謀, 1926-1970)를 ‘반혁명죄’로 고발했다. 곧바로 무장한 군인들이 몰려와 모친을 트럭에 짐짝처럼 싣고 가버렸다. 이후 장홍빙은 군중의 틈에 섞여 인민법정의 재판관이 모친의 판결이 선독(宣讀)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사형에 처한다! 즉각 집행!” 두 달이 채 못돼 모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향년 44세.

 

 

<2016년 5월 31일 문혁 발발 50주년을 맞아 중국의 봉황위성방송(鳳凰衛星視) “차갑고도 따뜻한 인생(冷暖人生)”에 출연해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죄를 참회하는 장홍빙씨>

소년의 모친 팡중머우는 1949년 해방 이전 간호병으로 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기초 보건지식만 갖고 의료현장에 투입됐던 이른바 “맨발의 의사(赤脚醫生)”였다. 1965년엔 구전현 병원의 문진(問津)부 부주임을 역임했는데, 문혁이 시작되자 곧 남편이 주자파로 몰려 비투(批鬪)당하면서 온 집안은 고난의 급물살에 휩싸였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 1968-1969) 운동은 흔히 “3천 만을 타격하고 최소 50만에서 최대 150만을 학살했다”는 최악의 전체주의적 테러였다. 그 시기 팡중머우는 “특무(特務, 특수간첩)”혐의의 지주분자로 몰려 구금 상태에서 날마다 문초당해야만 했다. 1950년대 초 그녀의 부친이 지주계급으로 분류돼 숙청됐다는 이유였다.

1970년 2월 13일, 장홍빙은 모친의 낡은 수첩에 적힌 “고귀한 자가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자가 가장 총명하다”는 어귀를 발견했다. 이 문구는 그 당시 마오쩌둥이 직접 인용해서 널리 회자됐었는데, 장홍빙은 모친에게 소리쳤다. “팡중머우!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 마오 주석을 폄하하려는 건가?” 격분한 모친은 류샤오치는 무죄라 주장하며 격렬하게 마오쩌둥의 인격숭배를 비판했다. 남편과 아들이 반혁명행위라며 무섭게 질책하자 그녀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까지 들고 와선 불태워버렸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 그녀는 난생처음 담배를 물고 뻑뻑 피웠다고 한다. 장홍빙의 부친은 신고를 한다며 뛰쳐나갔다. 혹시나 부친이 마음이 약해져서 신고하지 못할까 우려했던 장홍빙은 그날 밤 직접 모친의 반역행위를 고발했다. 먼 세월이 지나서야 변호사가 된 장홍빙은 문혁 당시 혁명의 광열에 휩싸여 스스로 씻지 못할 중죄(重罪)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통곡했다.

당시 장홍빙의 양친 모두 반동분자의 혐의를 쓰고 수난을 겪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문혁이 고조되면서 지주나 부농 집안 출신의 홍위병들은 더더욱 과격한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성분(成分)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들은 더 극단적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당시 상황에서 친모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하는 행위는 혁명성을 표출하는 극단의 조치였다. 출신 성분을 만회하려는 한 소년의 처절한 처세술이었다.

홍위병 집단의 내분에 관해선 앞으로 차차 상술하기로 하고, 일단 문혁 시대 중국에서 널리 유행했던 혁명가곡의 가사를 되짚어보자.

 

하늘땅이 크다 해도

당(黨)의 은혜처럼 크지 못하지

양친부모가 가깝다 해도

마오주석처럼 가까울 순 없지!

마오쩌둥 사상은 혁명의 보배

누구든 그를 반대하면 우리들의 적!

 

마오쩌둥은 “대원수 스탈린”을 이어서 지상에서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전 인류의 절대 “계몽군주”가 되길 염원했지만, 인격숭배와 테러정치를 일상화한 그의 통치는 반(反)계몽의 극치였다. 하물며 전체주의 세습전제정의 잔악무도한 폭군임에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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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무죄!” 10대 홍위병, 학살의 주체가 되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0.09.26 08:59

 

 

 

 

 

<1966년 8월 26일, 하얼빈 홍위병 집회에서 헤이롱장성 서기 겸 하얼빈 시위원회 제1서기 런중이(任仲夷)가 비투(批鬪)당하고 있다. 당시 사진기자 리전성(李振盛, 1940-2020)의 작품집에서 발췌. 李振盛, <<紅色新聞兵>> (香港中文大學, 2018), 103>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4회>

나치 정권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1961년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스스로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살았다고 진술했다. 그 법정을 참관한 철학자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는 아이히만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악의 상투성(the 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 개개인은 정교한 기계 속의 작은 부속이 되어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 길들여지면 끔찍한 정치범죄도 일상의 업무에 지나지 않는다.

1966년 8-9월 10대의 홍위병들은 분명 바로 그런 “악의 상투성”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그들은 살인이 허용되는 무법 상태에서 혁명의 사명감에 들떠 학살을 감행했다. 그 밑에는 법질서의 해체와 도덕적 아노미(anomie)가 깔려 있었다. 물론 그들은 최고영도자의 암시를 따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홍위병, 집단 구타로 교사 살해...학교에서 시작된 홍색공포

홍위병 폭력은 교내에서 시작됐다. 1966년 8월 5일, 베이징 사대 부속여중의 교감 볜중옌(당시 50세, 여)이 홍위병의 집단 구타로 사망했다. 홍위병이 살해한 최초의 교사였다. 8월 중순을 지나면서 폭력은 교외로 확산됐다. 홍위병의 테러행위는 민가의 급습 및 약탈, 문화유산의 조직적 파괴, 대량학살의 3단계로 전개되었다.

홍위병들은 반동세력의 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한다는 이른바 “초가(抄家)”의 명분으로 민가를 습격했다. 중국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8월 말부터 약 한 달간 베이징에선 3만3695호의 민가가 홍위병의 습격을 받았다. 상하이에선 8월 23일에서 9월 8일까지 “자산계급”의 거주지 8만4222호와 교사 및 지식분자의 거주지 1231호가 파괴됐다.

베이징에서만 10만3000량의(5.7톤) 금, 34만 5200량의 은, 554만원의 현금, 61만3600점의 골동품이 압수됐다. 상하이에서는 금은 등 보석 외에도 미화 334만 달러, 330만 위안화 상당의 외화, 370만 위안의 현금과 채권 등이 압수됐다. 1966년 10월, 공산당의 공식문건엔 전국의 홍위병들이 “착취계급”에게서 65톤의 금을 압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1966년 9월, 톈안먼 광장에서 마오쩌둥을 접견하는 홍위병의 환호/ 공공부문>

홍위병의 반달리즘: 역사유적의 파괴

홍위병들은 또한 문화유산과 공공재산을 파괴했다. 문혁 10년 동안 베이징의 국가지정 유적지 6843 곳 중에서 4922 곳이 훼멸됐는데, 그중 다수가 1966년 홍팔월(紅八月)의 테러로 파괴됐다. 홍위병들은 자금성(紫禁城)을 파괴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군대를 급파해 접근을 막았다.

1966년 11월 베이징의 홍위병 수백 명은 기차를 타고 산둥성 취푸(曲阜)로 내려가 4주간 머물면서 그 지역 홍위병들과 합세해서 공부(孔府, 공자 유적지)의 문화재 6618점을 파괴했다. 공자(孔子)에 대한 적개심은 지식분자에 대한 경멸로 표출됐다. 홍위병들은 역사유물 뿐만 아니라 공공 도서관도 파괴했다. 문혁 기간 전국 1100개의 현(縣) 단위 이상의 도서관 중에서 3분의 1이 폐관되었다. 랴오닝, 지린, 허난, 장시, 꾸이저우 등지에서만 700만권의 서적이 훼멸됐다.

다섯 부류의 검은 집단 색출해 살상

홍위병 집단의 주요 타격대상은 흑오류(黑五類), 곧 ‘다섯 부류의 검은 집단’이었다. “해방” 이후 17년이 지난 후였다. 지주, 부농, 반동분자, 파괴분자(전과자 등), 우파 등의 흑오류는 이미 제거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홍위병들은 법적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정치천민을 색출해 박해했다. 1966년 8월 18일에서 9월 15일까지 베이징 인구의 1.7프로에 달하는 7만 7000여 명이 축출됐다. 전국적으로는 39만 7000명이 도시에서 추방됐다. 보금자리를 잃고 추방된 정치 천민들은 헐벗고 굶주린 채 객사(客死)하거나 유민(流民)으로 떠돌았다.

 

 

<홍위병의 문화유산 파괴/ 공공부문>

홍위병들은 계급의 적인들을 잡아와선 구타하고, 고문하고, 모독하는 광기의 비투(批鬪)를 이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홍위병의 독타(毒打, 표독한 구타)에 맞아죽었다. 모멸감을 못 이긴 사람들은 자살을 택했다. 중국의 관방 통계에 따르면, 1966년 가을 베이징에선 1772명이 살해됐다. 같은 해 9월 상하이에선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됐다.

홍위병은 왜 폭력화됐나?

홍위병들이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1966년 8월 6일, 칭화대학 부속중등학교(이하 부중), 런민대학 부중, 베이징항공대학 부중의 홍위병 집단은 폭력행위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긴급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인신 난타(亂打), 부랑행위, 국가재산 파괴행위” 등을 일삼는 “가짜 좌파조직을 해체하자”고 선언했다.

1966년 8월 13일 ‘베이징 공인(工人) 체육장’(경기장)엔 7만 명의 홍위병들이 운집했다. 폭력의 근절을 위해 “소유맹(小流氓, 부랑아)” 십여 명을 단상에 올리고 비투(批鬪)하는 집회였다. 본래 취지와는 달리 집회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난폭한 집단구타가 발생하고 말았다. 중앙문혁소조의 부조장 왕런중(王任重, 1917-1992)이 그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들의 폭력행위를 방치했다. 당시 7만의 관중은 어떤 메시지를 받았을까. 현장 참석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바로 그 집회가 홍위병이 폭력화되는 중요한 계기라고 주장했다.

<‘낡은 세계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새계를 창립하자!’ 홍위병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 공공부문>

1966년 8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톈안먼 광장에서 모두 10차례나 큰 집회가 열렸다. 마오쩌둥은 군중과의 직접 대면을 원했고, 중공중앙은 무료로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면서 전국의 홍위병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도합 1200만 명의 군중이 톈안먼 관장에 모여 마오쩌둥을 “알현(謁見)”하는 영광을 누렸다.

1966년 8월 18일이 그 첫 집회였다. 새벽 한 시부터 몰려온 백만의 홍위병 군중이 텐안먼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새벽 5시 군장(軍裝) 차림으로 톈안먼의 성루에 올라 눈앞의 군중을 내려다보았다. 문혁 시절 서열 2위였던 린뱌오는 대규모 군중 앞에서 황홀경에 빠진 채 17분간 연설을 했다. 평소 신경쇠약으로 골방에서 벌벌 떨고 있던 린뱌오는 군중 앞에선 생동의 에너지를 내뿜었다. 그는 홍위병들을 향해 낡은 것을 깨부수라며 “파사구(罷四舊)!”를 외쳤다.

<“마오주석을 꼭 붙잡고 큰 바람과 파도를 헤쳐 앞으로 나아가자!” 당시 홍위병과 마오쩌둥의 공고한 심적 결합을 표현한 포스터/ 공공부문>

절정의 순간은 18세의 쑹빈빈(宋彬彬, 1949- )이 마오쩌둥의 왼쪽 위팔에 홍위병 수장(袖章)을 달아줄 때였다. 마오는 어린 소녀의 이름을 물었고, “쑹빈빈”이라 답하자 마오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彬)이냐?” 되묻고 나선 “요무마(要武嘛, 무[武]가 필요하지?)”라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흘린다. 언론의 대서특필로 이 대화가 알려지자 홍위병 집단을 들끓었다.

 

<1966년 8월 18일 “경축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백만인 대회.” 마오의 팔에 홍위병 수장을 달아주는 쑹빈빈. 얼마 후 쑹빈빈은 쑹야오우(要武)로 개명하고 홍위병의 대표로 활약한다. 이 대회가 열리기 13일 전 베이징 사대부여중 교내에서 교감 뱬중앤은 홍위병의 구타에 못 이겨 사망한다. 당시 쑹빈빈은 바로 그 홍위병 조직의 리더였기에 훗날 큰 논란에 휩싸인다./ 공공부문>

열흘 전 제8기 11차 전회에서 중공중앙이 채택한 “16조” 제 6항에는 “요용문투, 불용문투(要用文鬪, 不用武鬪)”라는 구절이 명시돼 있었다. 무력투쟁을 금지하고 글(文)로 투쟁하라는 주문이었다. 마오쩌둥은 요무(要武)란 한 마디로 중공중앙이 채택한 “문투(文鬪)의 원칙”을 조롱했다. 홍위병을 향해 무장투쟁에 나서라는 최고영도자의 주문이었다.

“혁명은 무죄이며, 반란은 정당하다.” 이제야 홍위병은 그 의미를 파악했다. 그들의 눈앞엔 살인까지 허용되는 무법천하가 펼쳐졌다. 학교 수업은 중단된 상태였다. 책 대신 곤봉과 몽둥이를 든 어린 학생들은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대신 잔혹한 학살의 경쟁을 시작했다.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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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의 후예는 반동”...홍위병, 광란의 대학살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0.09.19 08:57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23회>

<홍위병의 비투 장면. 절반만 삭발하는 “음양두(陰陽頭)” 처벌>

역사 상 수많은 권력자들은 편집증에 시달리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심신이 피폐해지기 때문일까.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의 비유대로 권력은 중기(重器)다. 한 평생 “무거운 그릇”을 얻기 위해 쟁투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교활하고, 치졸하고, 잔인해진다. 오죽하면 권력투쟁을 진흙창의 개싸움이라 할까. 계략, 음모, 사기, 술수, 협잡, 공갈, 협박, 식언, 망언, 망동, 거짓말, 린치, 테러···.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정치범죄의 사악함은 상상을 절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성년층을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 써먹는 수법이 최악이다.

미성년을 정치투쟁의 불쏘시개로...홍위병의 준동

전체주의 정권은 집요하게 청소년층을 파고 든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 파시스트 이태리의 바릴라(Ballia), 소련의 콤소몰(Komsomol) 등은 대표적인 전체주의 정권의 준(準)군사적 청소년 조직들이었다. 2차 대전 막바지까지 가장 필사적으로 연합군에 맞섰던 독일병정들은 10대의 “히틀러 유겐트”였음은 잘 알려진 바다.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히틀러 유겐트”의 규모가 급팽창한다. 1939년 3월 이후 17세 소년들이 강제 징집 대상이 되고, 1941년 이후 10세 이상의 남녀 청소년이 모두 징집된다./ 공공부문>

어린 시절 “히틀러 유겐트”로 활약했던 저명한 역사학자 헤르만 그라믈(Hermann Graml, 1928-2019)은 당시 청소년들이 나치정권에 매료된 이유를 열거하면서 제 3라이히의 강력한 정치권력, 나치정권의 선전선동 및 애국교육, 비밀결사 형식의 조직 활동, 히틀러 인격숭배의 흡입력, 나치정권이 연출한 모던한 분위기 등을 꼽는다. 아울러 그는 나치정권이 청소년들에게 가부장적 질서와 종교적 권위 등 “전통과 금기”를 파괴하는 정치적 폭력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설명한다.

그라믈의 설명은 문혁 시절 홍위병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절대적 권위를 갖는 최강의 권력기구였고, 중공정부는 이미 20년 공산주의 이념으로 청소년을 세뇌하고 훈습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살아 있는 인격신으로서 청소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사상은 “낡고, 늙고, 병들고, 뒤쳐진”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근대화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문화, 사상, 관습, 습관 등 “네 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고 “네 가지 새로운 것”을 세운다는 이른바 “파사구(罷四舊) 입사신(立四新)”의 구호가 이를 압축한다. 결정적으로 마오쩌둥은 청소년들에게 초법적인 “반란”의 권리를 보장한 후, 그들을 정치투쟁의 최전방에 내몰았다.

1966년 7월 8일, 마오쩌둥이 부인 장칭에 쓴 편지엔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위해서 천하대란(天下大亂)을 일으키겠노라!”란 말이 포함돼 있었다. 1966년 8월 “천하대란”을 일으킨 주체는 바로 홍위병이었다. 이른바 홍팔월(紅八月)의 학살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0년대 후반 홍위병의 모습/ 공공부문>

류사오치 겨냥...“사령부를 폭파하라!”

1966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중공중앙위원회 제8기 11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1966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필로 끼적였다. 이틀 후, 약간 수정된 그 글의 복사본이 전체회의에 배포했다. 200자 원고지 1장 분량의 짧은 글 속에서 마오쩌둥은 “지난 50일간 중앙에서 지방까지 어떤 영도 동지가 반동적 자산계급의 입장에서 자산계급의 독재를 실행해 왔고,” “자산계급의 위풍을 조장하고 무산계급의 의지와 기개를 훼멸했다”고 비난했다.

마오가 “대자보” 속에서 언급한 그 “영도 동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국가원수 류샤오치였다. 마오의 창끝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목을 겨눈 상황인데, 마오는 어설프게 실명을 들어서 그들을 공격하진 않았다. 문혁은 “대중노선”에 따라 대중의 의지대로 진행돼야 하는 민중의 혁명이었다. 마오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류와 덩은 혁명대중의 자발적 봉기로 권좌에서 축출되고 숙청돼야만 하는 “자산계급”의 주구(走狗)였다.

<그림 속의 누런 색 문건은 마오쩌둥의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다. 벽보에는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라!”가 적혀 있다.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이 외친 “조반유리”와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구호는 홍위병 폭력으로 이어졌다. 1976년 8월 문화혁명 집단화보 창작팀의 작품. 1976년 9월 마오 사망 한 달 전까지도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구호가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증거/ chineseposters.net>

8월 8일 마오의 주도 아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공중앙위원회의 결정 16조”가 채택된다. 그 대강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문혁은 군중이 스스로 해방되어 자발적으로 혁명을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다. 마오주석이 즐겨 말하듯 누구든 수영을 배우려면 직접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사회주의 혁명투사로 거듭나려면 직접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마오쩌둥 사상 대중노선의 원칙에 따라 중공중앙은 무조건 "군중을 신뢰하고,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의 지휘를 존중해야 하며, 무엇보다 “손을 놓고 군중을 발동(發動)시켜야만” 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인구의 5%에 불과한 “가장 반동적인 우파들,” “극단적 반동 자산계급 우파분자들”을,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들을 고립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해선 95%의 인민이 대동단결을 해야만 한다. 인민의 단결을 위해선 문혁소조, 문혁위원회, 문혁대표대회가 군중노선의 구심이 돼야 한다.

16조의 마지막은 “마오쩌둥 사상이 문혁의 지도이념”이라는 테제다. 요컨대 16조는 마오쩌둥 사상과 군중노선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중공중앙의 공식 문건이다. 16조의 행간 마다 류샤오치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읽힌다. 그가 바로 투쟁의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군중을 억압한 반동집단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전체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류샤오치의 몰락은 이미 공식화됐다. 중공중앙 정치국상무위원회 서열 제6위였던 린뱌오가 제2위로 올라가고, 서열 제2위의 국가원수 류샤오치는 제8위로 밀려났다.

<1966년 8월 9일자 인민일보의 제 1면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위원회의 결정 16조가 게재됐다. 16조는 이후 문화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의 기본원칙이 된다.>

때려죽이고, 매달아죽이고...10대 홍위병, 잔혹한 학살극

“혁명은 무죄다!” “혁명은 곧 폭동이다!” “반란은 정당하다!” “사령부를 폭파하라!” “낡은 것을 파괴하라!” “혁명을 일으켜야 혁명을 배운다!” 1968년 8월 공적 매체를 통해 날마다 전 중국에 하달되고 있던 마오쩌둥의 행동 명령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은 바로 “군중의 자발적 반란”이었다. 군중의 자발성을 억압하는 모든 조치는 반동적 자산계급의 음모로 인식되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홍위병 조직은 일시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대학 및 중등학교에 국한됐던 홍위병의 활동은 초등학교까지 확산되고, 수개월 후면 급기야 노동자·농민 계급의 혁명운동으로 비화된다.

당시 언론에선 일언반구도 다루지 않았지만, 그해 여름 베이징에선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졌다.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난 홍위병 폭력은 “1949년 해방” 이전의 지주, 자본가 및 그 후예를 지칭하는 ‘계급천민’과 반동적 지식분자들에 가해졌다. 홍위병은 “반동의 후예는 반동”이라는 이른바 "혈통론(血統論)을 처형의 이유로 내세웠다. 사회주의 혁명이 빚어낸 새로운 신분제가 아닐 수 없었다.

10대의 홍위병들은 민가를 급습해 샅샅이 뒤지고 터는 “초가(抄家)”의 폭행을 일삼았다, 그들은 모든 유물을 박살내고, 계급 적인(敵人)을 색출해 살육하는 백주의 테러를 이어갔다. 베이징의 창핑(昌平)현과 다싱(大興)구에선 특히 잔혹한 학살극이 펼쳐졌다.

비판적 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의 기록에 따르면, 곤봉으로 때려죽이고, 작두로 썰어 죽이고, 밧줄로 매달아 죽이고, 심지어는 영유아의 팔다리를 짓밟고 당겨 찢어 죽이는 광란의 대학살이었다. 1980년 “북경일보” 12월 20일자는 1966년 8월-9월 사이 베이징에서 홍위병에게 “맞아 죽은” 피해자의 숫자가 1772명이라 보도하고 있다. 10대의 청소년들이 대체 어쩌다 이토록 잔혹한 학살극의 주역이 되었나?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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