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니스 세계에서 전략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좋은 전략을 짜고 실행하기 위한 기업의 전략경영 활동과 노력이 다각적으로 펼쳐지고 있지만, 많은 기업들이 전략 부재 상태보다 더 나쁜 상황인 나쁜 전략의 덫에 걸려 실패를 반복한다. 전략을 실패로 이끄는 함정들에 대해 알아본다.
원래 전략(Strategy)은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아테네 지역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을 칭하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9세기까지도 이 개념은 ‘전쟁에서 적을 속이는 술책’정도의 의미에 머물렀다. 하지만 20세기들어 전략의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촉발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계기로, 군사 분야에서 보다 구체화된 형태의 군사 용어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아군의 자원(Resource)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적군을 패배로 이끄는 체계적인 계획(Plan)’이 그것이다. 이후 정치, 경제,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략이란 말이 널리 쓰이면서 전략은 일상 용어만큼이나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얼마 전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초라한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스포츠 평론가와 축구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던 실패의 원인을 한번 떠올려 보자.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전략 부재(Absence of Strategy)’였다. 이처럼 전략은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키워드 내지는 핵심 요소로 간주된다.
전략은 선택이 아닌 필수
비즈니스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기업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전략경영(Strategic Management)’이 한층 더 강조되는 분위기다. 여기에는 남들보다 차별적이고 창의적인 ‘좋은 전략(Good Strategy)’을 구사하는 기업일수록 시장을 선도할 가능성이 높아, 자연스럽게 안정적 생존과 지속적 성장을 보장받는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렇다 보니 전략은 필요에 따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경영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좋은 전략을 짜고 실행하기 위한 기업의 전략경영 활동과 노력도 다각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예컨대 웬만한 기업에 전략기획 혹은 경영전략을 담당하는 전담부서가 없는 곳이 드물다. 기업 규모가 클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업 차원에서는 각종 다각화 전략, 리스트럭쳐링 전략, 다운사이징 전략, 신사업 전략 등이 소개되는가 하면, BCG 메트릭스, SWOT 분석, 시나리오 플래닝 등 전략 수립을 위한 다양한 기법과 툴도 쏟아져 나온 바 있다. 개별 기능단위에서도 R&D전략, 마케팅전략, HR전략, 생산 및 품질전략 등 전략이란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더욱이 과거처럼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식의 Plan-Do-See 관점의 ‘사업계획수립 및 업적평가 미팅(Goal Setting and Performance Review Meeting)’ 이 외에도 GE의 ‘세션C’와 유사한 ‘전략 미팅(Strategy Consensus Meeting)’을 정례적으로 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문제는 나쁜 전략이다
그런데 이 같은 노력과 활동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만큼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기업을 보게 된다. 이런 기업들은 사실상 전략 부재 상태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 즉 ‘나쁜 전략(Bad Strategy)’의 덫에 걸려있지 않은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UCLA 앤더슨경영대학원의 리처드 루멜트 교수는 나쁜 전략의 특징을 ‘실질적 내용 없이 어렵고 추상적인 미사여구만 넘쳐나는 전략’, ‘진짜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변죽만 때리는 전략’, ‘목표와 전략을 혼동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없고 달성하고 싶은 희망사항을 목표로 가득 메우고 있는 전략’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현실적으로 나쁜 전략이 만들어지는 것은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하나는 애초부터 잘못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결과적으로 나쁜 전략으로 전락한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 처음에는 이로움을 준 좋은 전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함에 따라 빠르게 전략을 수정하지 않아 낭패를 보게 되는 것에 해당한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건, 결과적으로 나쁜 전략이 되었던지 간에, 나쁜 전략은 전략경영을 실패로 이끄는 치명적 함정이다.
나쁜 전략을 양산하는 5가지 함정
그렇다면 기업은 ‘왜 나쁜 전략을 수립하게 되고, 좋았던 전략마저 나쁜 전략이 되게 만드는 우를 범할까’. 이에 최고경영자와 전략 실무자들 모두가 되새겨 보아야 전략을 실패로 이끄는 몇 가지 대표적 함정들에 대해 알아본다(<그림 1> 참조).
1. 눈가리개(Blinders)
‘전략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받는다면, 십중팔구는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경로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강점이다’라고 답한다. 이처럼 전략이 제시한 방향성은 원대한 포부나 비전의 토대가 되기도 하고, 구체적이고 도전적인 목표를 세울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기존 사업을 지속할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지’, ‘신제품으로 승부할지, 기존 제품의 차별화로 대응할지’, ‘조직 운영과 사람 관리 방식은 어떻게 가져갈지’ 등에 대한 의사결정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전략의 적은 전략이다’란 말이 있듯이, 때로는 전략이 선사하는 강점 요인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전략의 방향이 오히려 ‘눈가리개’가 되는 경우다. 특히 환경의 불확실성과 동태성은 기존의 전략 방향으로 거둔 성공 체험을 눈가리개로 만들게 한다. 이는 전략을 수정할 타이밍을 놓치게 하거나 아예 변화 자체를 못하게 막아버리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 침몰한 기업들은 여러 산업에 걸쳐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아날로그 필름 사업의 100년 기업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를 먼저 개발하고도 1990년대 중반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디지털카메라 시대에 대비하지 못하고 기존 사업 전략을 고수하다 2012년 파산 신청을 했다.
최첨단 유무선 통신기술을 독점해 왔던 모토롤라 역시 새롭게 부상하던 지상파 휴대전화 시장을 적극 공략하기 보다 1998년 이리듐 위성전화 개발에 50억 달러를 투입하다 낭패를 보았다. 핸드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는 애플과 같은 혁신적 스마트폰 기업들에 밀려 침몰하고 말았다. 미국 최초로 할인점 개념을 도입한 유통업체 K마트도 100여년 가까이 1위 자리를 고수하다 월마트에 1991년 최초로 역전 당했다.
당시 K마트는 1등 유통업체로서 자존심을 지키려고 자신의 사업 전략을 고수했다. 그런데 IT기반의 첨단 물류시스템을 활용한 월마트의 저가 전략이 시장의 판도를 바꿀 것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전략을 수정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2002년에는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만다. 이 같은 일은 최근에도 지속되고 있는 모습이다. 1985년 설립되어 미국 최대의 비디오·DVD대여 체인점이었던 블록버스터가 올해 초 300개의 매장을 폐쇄하고 2,8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이 또한 기존 전략의 성공에 젖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콘텐츠 유통의 변화를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터넷 기반 유통 서비스로 과감히 탈바꿈한 후발주자 넷플릭스에 밀려 파산 신청에 이르게 된 것이다.
2. 집단사고(Groupthink)
전략은 명확한 방향성도 제시하지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자신이 보유한 역량과 한정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 만일 조직 구성원들의 노력을 하나의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전략이 없다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가버려 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혼란을 최대한 방지한다는 점에서 전략은 유용한 도구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한 곳에 노력을 집중해 공을 들이다 보면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앞서 눈가리개에 함정에 빠져 침몰한 실패 기업들의 전략처럼 된다. 게다가 명확한 전략 방향에 따라 선택과 집중의 노력을 기울일수록 조직은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도 높인다. 기존 전략이 눈가리개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 조금은 늦었더라도 재빨리 전략을 수정하고 새로운 변화를 꾀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사고에 함정에 빠진 기업의 임직원들은 판단력을 잃고 사업이나 제품 상의 결함이 발견되었는데도 기존 방식을 밀어붙이거나 변화의 조짐이 있는데도 이를 거부해 낭패를 보게된다. 인지심리학의 대가 찰스 키슬러 박사는 “전략이 명확할수록 조직 구성원들의 마음과 관습에 깊이 새겨진다. 더군다나 한 방향으로 자신의 노력을 집중해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구성원들에게 전략 변화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를 불편해하며 심리적 저항감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구성원들은 결국 조직에 이익이 되는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 논리부터 찾게 된다.”라고 지적한다.
한 때 잘 나갔던 PC기업 델은 20년 간 승승장구하며 전 세계 PC시장을 장악했었다. 그러던 델이 2006년 매출성장률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HP에 1위 자리를 빼았겼다. 그 해 마이클 델 회장은 비즈니스위크지가 선정한 2006년 최악의 경영자로 지명되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간명하다. 데스크톱에서 랩톱으로 바뀌고 있는 시장과 고객 니즈의 변화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략기획부서의 한 임원이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델의 모든 경영진과 전략 실무자들이 집단사고에 빠져 ‘소비자들은 여전히 좀 더 싼 가격에 PC를 공급받기를 원한다. 노트북처럼 비싼 제품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믿음을 고수하며 시장의 변화를 외면해 버렸다.”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이동 중에도 무선인터넷을 100% 활용할 수 있는 가볍고 편리한 노트북 기술 개발에 경쟁업체들이 열을 올릴 때도 델의 경영진은 이를 무시한 것이다.
앞서 간략히 소개된 바 있는 코닥의 실패 원인을 한번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코닥은 눈가리개의 함정 이외에도 집단사고의 함정에 함께 빠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코닥은 13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아날로그 필름과 카메라 시장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하던 기업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디지털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앞서도 간략히 언급된 것처럼, 그 주된 원인은 기존의 사업 전략이 눈가리개가 되어 시장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가장 먼저 개발해 놓고서도 당시 코닥은 전성기를 누리던 필름 사업 위축을 염려한 나머지 디지털카메라의 상업화에 미온적 태도로 일관했다. 주춤하는 사이 시장의 판도는 급변했고 다른 기업들에게 디지털카메라 사업의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코닥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91년 190억 달러에 달했던 매출액이 2003년 130억 달러로 추락할 때까지도, 코닥은 기존의 필름 중심의 사업 전략을 여전히 고수했다. 일례로 디지털카메라를 공략하는 전략을 고민하기 보다는 기존 필름보다 여러 기능이 결합된 새로운 필름 카메라를 개발하는데 수십 억 달러를 투자했다. 기존 사업 전략에 눈이 가려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경영진의 기대는 조직 전체를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위기감이 정점에 이른 2000년대 초반까지도 전략기획부서는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에서 필름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장밋빛 전망과 수치 만을 내놓으며 기존 사업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보고했던 것으로도 알려진다. 조직 내에 어느 누구도 기존 사업 전략을 폐기하고 과감히 새롭게 도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기존의 사업 논리를 뒷받침할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탐색하고 그 가능성 만을 고민했던 것이다.
3. 구상과 실행의 분리(Separation)
역사적으로 기업 조직의 전략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이다.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을 예측하고 이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이후 전략기획실, 기획조정처, 경영전략팀 등 다양한 이름의 전략부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여기서 전략 스탭들은 체계적인 자료 수집과 정교한 분석을 담당하며,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투자 심의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검토하는 등 경영진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전략기획 기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발생한다. 전략 수립을 위한 다양한 분석 기법과 툴이 개발되면서, 기업은 현장의 다이나믹스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보다 분석과 보고서 작성 능력이 출중한 MBA 출신으로 전략 조직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무실 안에 틀어박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세련된 보고서로 경영자들을 매료시키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난 부작용이 바로 구상과 실행의 분리 현상이다. 원래 전략이란 계획을 세우는 수립 작업과 실행이 일심동체처럼 함께 돌아가야 한다. 사무실에 앉아 방대한 하드 데이터를 분석해 가며 이루어지는 보고서 중심의 전략 만들기는 현장의 다이나믹스나 고객의 목소리를 경청하는데 둔감한 조직을 낳아, 이것이 전략 실행단의 이슈에 소홀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와 상반되게 고성과를 창출한 탁월한 전략 중에는 최고경영자나 전략기획 조직에서 구상한 것이 아니라 현장의 실무자가 현장의 미묘한 변화와 반응을 감지해 이들에 의해서 발현된 경우가 적지 않다. 사전에 철저히 계획되거나 원대한 비전이 아니라 시행착오와 학습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카메라 사업에서 혁명적인 아이디어로 불리는 폴라로이드 즉석카메라가 대표적인 예이다.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기던 세 살배기 딸아이가 ‘방금 찍은 사진을 왜 보여주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린 것이 시발점이 되어, 딸의 불만에서 힌트를 얻은 실무자가 결국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개발했다. 존슨앤존슨이 소매용 파우더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도 사전에 의도된 전략의 결과가 아니었다. 병원에 깁스를 공급하던 존슨앤존슨의 영업담당자가 우연히 깁스에서 발생하는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파우더를 첨가한 깁스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자 몇몇 소비자들이 ‘파우더만 따로 구입할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고 한다. 현장의 미묘한 반응을 감지한 영업담당자의 건의로 회사는 재빨리 화장실용과 아기용 파우더 제품을 내놓았고, 이것이 히트 제품이 되었다.
최근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는 지속되고 있다. 우연히 일상 생활 속에서 불편했던 경험이 업계의 판도를 바꾸는 일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블록버스터를 쇠락의 길로 몰아넣은 넷플릭스도 사업의 시작은 일상 생활 속 작은 경험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사업 모델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보스턴 출신의 리드 해스팅스는 블록버스터의 단골고객이었다. 그런데 평소 그를 열 받게 한 블록버스터 서비스에 대한 불만은 턱없이 비싼 연체료였다. 결국 그는 ‘비디오 하나 연체해 40달러를 연체료로 지불하느니, 한 달에 30~40달러를 내고 회원 가입하면 비디오를 집으로 배달해주는 사업을 하자’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회원제 우편 비디오 대여 회사인 넷플릭스를 탄생시켰다. 이후 넷플릭스는 오프라인 사업을 대폭 줄이고 주문형 스트리밍 서비스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며 사업 전략을 변화시켜갔다. 단돈 1만 원만 내면 한 달간 원하는 동영상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OTT(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를 내놓은 것이다. 별도의 셋톱 박스가 없어도 인터넷망만 연결되어 있으면, PC나 TV에서 고객이 원하는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점차 10만 원대 이상의 고가 유료방송을 해지하고 넷플릭스를 보는 시청자가 늘어났고, 넷플릭스의 유료 가입자 수는 미국 최대의 케이블 방송사인 HBO보다 많아졌다.
4. 하드 데이터(Hard Data)
1980년대 중반 GE는 전략 플래닝을 위해 구축한 두꺼운 매뉴얼과 시스템을 폐기해 버렸다. GE의 전략기획부문 임원을 역임한 바 있는 이안 윌슨 박사가 발표한 ‘전략 플래닝은 죽은 것이 아니라 변한 것이다(Strategic Planning isn’t dead, it changed)’라는 논문을 보면 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당시 GE가 전략 플래닝을 폐기한 이유에 대해 그는 “당시 GE를 보면 전략 스탭들이 정교한 분석에 천착하면서 전략 플래닝 방법론은 갈수록 정교해져 갔다. 진정한 전략적 통찰에는 소홀하고, 데이터 분석을 전략적 사고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이렇다 보니 전략 수립과 전략 실행 간의 괴리가 커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예측은 번번히 빗나갔다.”라고 지적한다.
전략을 만들기 위해 내외부 환경을 분석하는 일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하드 데이터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해석해 내는 것은 복잡한 현상을 보다 쉽고 단순 명쾌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하드 데이터를 활용한 분석이 지닌 약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 현실을 왜곡해 잘못된 전략을 양산할 가능성도 높다. 캐나다 맥길 경영대학원 교수 핸리 민츠버그 박사는 그의 저서 <전략 플래닝의 등장과 쇠퇴>를 통해 하드 데이터 분석의 소프트한 4가지 약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하드 정보에는 중요한 비경제적, 비수량적 요소가 풍부하게 담겨있지 않다. 예컨대, 고객의 얼굴 표정, 공장 내 분위기, 정부 관리자들의 어조 등 새롭고 급진적인 변화의 단초가 될 수도 있는 질적 정보가 빠졌다는 것이다. 둘째, 효율성을 위해 하드 정보를 지나칠 정도로 단순화한다. 이 경우 숲과 나무를 모두 보지 못하고 숲만 보게 되는 약점에 노출될 수 있다. 셋째, 하드 정보는 너무 늦다. 정보가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트렌드, 사건, 실적 수치 등 객관적 정보들이 집계되어 분석하여 보고서로 작성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다 보니 하드 정보에 의한 분석 결과는 실제로 전략을 만드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때때로 전략은 당장의 자극에 순발력 있게 반응할 때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넷째, 실제로 신뢰할 수 있는 하드 정보가 놀라울 정도로 없다. 갖가지 편견에 의해 왜곡되기 쉬운 비정량적인 질적 정보가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하드 정보 역시 갖가지 가정과 조건에 의해 다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려 233억 유로(약 28조원)의 적자를 기록해 프랑스 경제의 최대 골칫거리로 떠오른 비벤디 유니버설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이 회사는 원래 수도사업, 폐기물처리사업 분야 등 유틸리티 사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이었다. 1980년대 다각화 전략으로 몸집을 키워 기업 규모를 10배 이상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로 인한 경영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새로 취임한 CEO 메시에는 그 원인을 분석하고, 방만했던 사업 포트폴리오를 대폭 구조조정하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비벤디 유니버설은 미래 사업의 청사진을 다시 그리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CEO를 주축으로 전략기획실에서는 경제, 시장, 산업에 걸친 방대한 데이타를 수집해 분석해 가며, 신규 진출 사업을 모색하게 되었다. 분석 결과로 도출된 결론은 소위 ‘디지털 컨버젼스 구현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유니버설스튜디오, 카넬 등을 인수합병해 미디어 유통채널 및 컨텐츠 사업에 진출했다. 방송, 통신서비스, 영화, 음악, 출판, 게임, 인터넷 포털 등 전 분야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몇 해 지나지 않아 참담한 실패를 맞게 된다. 주가는 반토막나고 회사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문제는 사업 전략을 모색할 때 고려했던 방대한 하드 데이타에 포함되지 않았던 몇 가지 요인들 때문이었다. 바로 신규로 진입한 미디어 분야에 대한 ‘경험 부족’과 ‘경영 역량 부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신규사업 운영에 필요한 역량이나 사업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 대한 고려와 같이 비경제적이고, 비정량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5. 경직성(Rigidity)
마지막으로 경계해야 할 함정은 경직성이다. 앞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객관적이고 방대한 하드 정보를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거나 사업 계획을 수립하더라도 전략 실행 과정에서 잘못되는 경우도 생긴다. 때로는 전략이 공식적으로 수립되기 이전에 현장에서 올라온 작은 변화가 전략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환경의 불확실성과 역동성이 높아질수록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활동과 절차에 기반한 의도된 전략 프로세스는 효과를 보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전략 이론가 알프레드 챈들러 박사는 ‘구조는 전략을 따른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전략과 조직 시스템 간의 정합성이나 연계성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되는 유용한 메시지의 하나로 유명하다. 전략이 조직구조나 시스템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해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초기 전략가들은 이 메시지에 열광하며 전략을 수립하고 수립된 전략에 맞추어 조직 체계나 시스템을 갖추어 가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조직의 상층부에서 아무리 멋진 전략을 생각해냈다고 해도 단기간 내에 조직 시스템을 바꾸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조직에 뿌리 깊게 체화된 조직문화, 권력관계 및 학습역량 등은 쉽게 바꾸거나 단기간에 수정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전략을 항상 앞에 두고 나머지를 뒤에 두어야 한다는 경직된 생각이다. 의도한 전략에 맞추기 위해 조직을 엄격히 통제하면 할수록 조직은 경직되고 수동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이와 관련해 썬더버드 국제경영대학의 앤드류 인크팬 교수는 ‘전략 부재의 이론(Theory of Strategy Absence)’이란 논문을 통해 “지나치게 공식화된 전략 수립 절차에 의존하며, 전략의 일관된 실행을 위해 조직 시스템을 엄격히 통제하는 조직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실험하고 혁신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기존 전략의 경직된 패턴에 빠지기 보다 의도적으로 전략 부재의 상태를 만들 때 유연성과 혁신성을 키울 수 있다. 게다가 전략 부재는 오히려 내외부의 이해관계자들로부터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흡수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고 역설한다.
지나친 맹신을 버려야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이 높아질수록 기업들은 이상과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커질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전략의 좋고 나쁨을 따지며, 기존의 전략경영 체계나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더욱 참신한 것을 찾기에 앞서 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부터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핸리 민츠버그 교수는 “아무리 세련된 전략 수립 프로세스와 정밀한 분석 툴을 갖추었어도 나쁜 전략이 양산되는 이유는 기업이 빠지기 쉬운 심리적, 구조적 혹은 관성적 함정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전략스텝들이 전략에 대한 지나친 맹신이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그릇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라고 조언한 바 있다. <끝>
출처 : LG경제연구원 http://www.lgeri.com/management/strategy/article.asp?grouping=01020100&seq=287&srchtype=0&srch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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