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좁고 중국 넓다? 일본 넓고 중국이 좁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①-넓은 일본의 키, 류큐>
류큐를 둘러사고 있는 해역 넓이 일본 전체 관할 수역의 30% 초과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0.12.17 09:29:08)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일본은 넓고 중국은 좁다.
태평양은 일본을 향해 두 팔 벌려 미소짓고 있으나 중국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우리들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 속에는, 아직도 나라의 영역을 영해나 영공을 포함시키지 않은 순수한 물의 넓이, 즉 영토의 면적만으로 생각하는 착시현상이 관습처럼 남아 있다.
사람들은 보통 좁은 섬나라 일본, 광활한 대륙의 나라 중국이라 부른다. 또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세계지도를 펴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은 넓고 중국은 좁다는 숨겨진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는 해양의 시대이다. 일찍이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낸 존 헤이(John Milton Hay, 1838~1905)는 19세기 말에 이렇게 말했다.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이다.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다.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이다.”
혜안과 선견지명이 있는 해양사관의 핵심을 간파한 말이다. 영토의 개념에는 육지, 바다, 하늘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된다. 바다는 우선 물리적 공간으로 볼 때 다섯 가지 층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바다의 표면(surface of sea)이 있는데, 주로 선박의 항해에 사용된다. 이는 상품과 사람의 운송, 군사적 이용 등 통상, 교통, 군사 면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셋째, 수역(water-column)은 엄청난 생물자원을 지니고 있다. 각종 어폐류 해조류 등 수산물과 소금이 인간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수자원과 군사적인 잠수함의 이용 등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넷째, 해저표면(seabed)을 들 수 있다. 특히 현대 산업사회에서 중요한 망간, 니켈, 구리, 코발트 등이 깊은 해저에 엄청난 규모로 깔려 있어서 제3차 해양법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다섯째, 지하층인 해저(subsoil)에는 석유와 천연가스는 물론 일명 불타는 얼음이라 불리는 가스하이드레이트(gashydrate)가 대량으로 묻혀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 20세기부터 지하 1층 지상 4층 빌딩인 바다의 활용가치가 육지보다 훨씬 귀중해지고 있다.
일본의 땅은 중국의 땅에 비해 좁지만, 일본의 바다는 중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넓다.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일본은 지금 태평양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다. 일본의 육지 영토면적은 약 37.7만㎢이나 200해리 관할수역 면적은 육지영토면적의 10배나 넘는 약 386만㎢나 된다.
반면 중국의 육지 영토면적은 약 960만㎢이나 해양면적은 육지면적의 6분의 1에 못 미치는 약 135만 ㎢의 관할수역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북쪽 홋가이도에서 남쪽의 오키나와와 센카쿠를 포함하고 있는 류큐 해역까지의 길고 긴 해안선의 연장선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미국본토 서해안의 그것보다 더 길다. 일본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광활한 바다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바다를 제압하는 자는 언제인가 제국마저 제압하기에 이른다는 키케로의 명언처럼 해양제국을 이루고 있는 일본에 부러움 반 두려움 반을 느끼며 일본열도에 관하여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가장 큰 의문점은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나아가 전태평양 연안지역의 세력판도를 결정하는 역사(시간의 씨줄)와 지리(공간의 날줄)의 십자가를 이루는 교차점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주는 흔히 온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낱말로 사용된다. 그러나 우주는 천체를 비롯한 만물을 포용하는 물리학적 공간을 뜻하는 우(宇)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 없는 무한한 시간을 나타내는 주(宙)가 질서 있게 통일된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시간(역사)과 공간(지리)을 별개의 독립변수로 삼아 접근하는 방식을 탈피하여, 이를 동화적으로 질서있게 통합하여 목표를 불침항공모함 일본호를 우주(시간과 공간)의 십자가 한가운데 놓고 조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다시 말해 필자는 씨줄(宇)과 날줄(宙)의 교차점의 한 지점을 동중국해와 태평양을 남북으로 길게 가르며 이어지는 일본열도의 긴 꼬리,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류큐군도와 그 군도를 에두르고 있는 광대한 해역이라고 설정해보겠다.
류큐는 가고시마현과 타이완 사이에서 이른바 류큐호(弧)를 그리고 있는 오키나와, 다이도, 미야코, 야에야마, 센카쿠 등 크고 작은 140여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류큐의 총면적이 2388㎢로, 땅 면적만 치면 우리나라의 제주도보다 좁다.
그러나 류큐를 둘러싸고 있는 해역의 넓이는 일본전체 관할수역의 30%를 초과하는 광대무변한 것이다. 또한 류큐 해역은 최근 시라카바(중국명, 춘샤오. 春曉) 등 무궁무진한 원유와 천연가스의 매장량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류큐의 중심인 오키나와는 필리핀의 마닐라, 타이완의 타이뻬이, 한국의 서울을 꼭지점으로 연결하는 삼각형의 밑변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미국의 군사전략은 바로 그 밑변의 한가운데에다 미사일과 전술핵무기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류큐가 갖는 독특한 지정학적 중요성은 140여개 도서를 체인으로 연결 중국이 태평양으로 향하는 출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는 점이다.
류큐 연구 과정에서 필자는 거의 전무 하다시피 한 류큐에 대한 학술적 자료와 부족으로 여간 곤란을 겪은 게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소박한 바람은 학계나 전문연구인들께서 그간 류큐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역사, 지리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소홀히 하여 온데 대한 초보적인 문제 제기나마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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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②-제1차 일제의 은신처, 류큐>
400년동안 일본은 류큐 해역서 5번의 대전환…그 첫번째가 도요토미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과거 400여년 동안 시간의 바다에서 '불침항공모함' 일본호(日本號)는 크게 잡아 다섯 번 쯤 키를 돌렸다. 그 다섯 번의 대전환이 이루어진 공간의 바다는 모두 류큐 해역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호는 류큐 해역에서 내부적 통일에서 외부적 도발로 방향을 돌리다가(1591년), 다시 팽창주의에서 쇄국주의로 전환하는 계기를 이룩했다(1609).
그러다가 류큐해역 근처의 사스마번(薩摩 蕃·현재의 가고시마 鹿兒島)이 주도하는 메이지 유신(1868)으로 내부적 단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류큐에서 키의 방향을 제국주의적 도발로 대전환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70년간 팽창할 대로 팽창한 일본제국호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로 역사의 내리막길로 떨어지게 된다. 류큐해역에서 좌초하게 되기 때문이다.
패전 후 27년간 일본은 확산욕구의 본능적 충동을 경제 분야로 집약시켜오다가 다시 류큐에서 또 다시 정치외교군사대국의 지향으로 방향을 바꾸어(1972년 오키나와 반환, 중국과의 수교 등)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일본의 축소와 팽창의 전환점, 류큐
◇ 중국(적색)과 일본(황색)의 해역 표시도. 출처 http://image.baidu.com/i?ct=503316480&z=0&tn=baiduimagedetail&word=%D6%D0%B9%FA%BA%A3%D3%F2%B5%D8%CD%BC&in=
일본의 축소와 팽창의 전환점, 류큐
1587년 규슈(九州)를 평정하여 전 일본을 통일하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확대지향적 인물이었다. 지방 영주들의 불만과 잔존하는 강력한 그들의 군사력을 중국대륙과 한반도 정벌을 내걸어 욕구불만을 해소시키고, 자신의 과대망상적 야심을 통일 일본의 막강한 역량에다 전환시켜 폭발시키고 싶었다.
도요토미는 조선을 거쳐 중국과 인도대륙까지를 정복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1592년, 그는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비켜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선에 대한 두차례의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도중에 병사하였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8개월 전인 1591년 8월 사스마번의 시마즈(島津)에게 조선침략을 위한 1만 5천명의 군역부담을 명하자, 10월 시마즈는 류큐왕국에게 병정 징집을 대신하여 7,500명의 10개월분 군량미 11,250석과 황금 8천냥을 상녕(尙寧)왕에게 요구했다. 류큐왕은 이를 거부하고 삼사관(총리격)인 정형(鄭逈)으로 하여금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계획을 명나라 조정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사쓰마는 류큐사신을 억류하고 왜의 사신을 류큐로 보내 군사 7,000명의 10개월 양식을 조선에 상륙한 왜군에게 보낼 것을 강요했으나 거절당했으며, 이에 류큐군도 북부 5개 섬을 사쓰마에 양도하라고 강박했으나 이 역시 류큐는 거부했다.
같은해 , 도요토미는 에조의 땅 홋카이도(北海島)의 마쓰시마를 복속시켰다. 현재 남한의 전체면적에서 충청북도를 뺀 면적만한 홋가이도가 그때부터 일본 중앙정부의 지배아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일본 열도의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홋카이도의 복속은 도요토미의 팽창주의 영토욕에 따른 유일한 성공이자 빛나는 제국주의적 업적이었던 것이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막부(바쿠)를 열었다. 그는 도요토미와는 달리 축소지향적인 인물이었다. 도요토미가 확대지향적이거나 아직 세력되지 못한 형태의 일본 제국주의자였다면, 도쿠가와는 내향적이며 축소지향적인 쇄국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류큐의 이중속국화가 도쿠가와 시대에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는 어쩌면 쇄국주의자가 아니라 도요토미보다 훨씬 세련되고 노련한, 현실주의적인 일본 제1차 제국주의의 완성자였다.
1609년 3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인을 받은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이끌고 류큐왕국을 침략했다. 침략의 주된 이유는 임진왜란시 류큐의 협조거부였다. 4월 5일 수도 슈리성을 점령하고 류큐의 문물을 약탈했다.
류큐 국왕 이하 100여 명의 고관들이 사쓰마번으로 납치당했다가 2년 6개월 후에야 도쿠가와에 대한 복종의 맹세와 서약을 하고 풀러났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 충신 정형은 명나라 황제에게 원병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발각되어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져 죽음을 당했다.
도쿠가와는 중국을 부국(父國)이라 부르며 중국에 신복해 오던 류큐를 중·일 양국의 이중종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편 1609년은 조선과 국교회복을 축하하는 대규모 일본측의 사절단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사절단의 상경을 거절하고 부산포의 왜관에 며칠 머물게 한 후 곧 돌려보낸 사건이 있던 해이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부터 1609년 류큐의 침략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다시 살펴보면, 일본은 마치 무턱대고 큰 것을 노리는 것보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차지해나가는 것이 유리하고 현명한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초보적 형태의 일본 제국주의의 원조격인 도요토미의 팽창 확대지향적 대외정책에서, 1603년 새로 막부를 세우고 전국을 장악한 도쿠가와는 수렴과 내실을 기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는 1648년에 쇄국을 완성하여 나가사키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전체 동아시아의 해외무역을 주름잡고 있다시피한 류큐를 정치 외교적 명분만은 중국에 양보하고 경제와 무역방면의 실리를 가로채는 교묘한 책략으로써 나라의 살림을 살찌워가고 있었다. 약소국 류큐는 일본 제국주의 야욕이 축소되고 압축된 형태로, 숨쉬고 있는 까만 씨앗과 같은 것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일본의 본격적 제국주의 침략형태로 미루어보아, 필자는 일본제국주의가 류큐에서 얻은 역사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첫째, 작은 것이 아름답다. 큰 것보다 우선 작은 것부터 차지하라.
둘째, 정치 군사적 지배보다 우선 경제 무역 면에서 장악하라.
셋째, 대륙의 얼굴이나 심장부보다 우선 그의 복부와 옆구리를 공격하여 조금씩 힘을 빼라.
결과적으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실패를 교훈삼아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15대를 세습, 260년의 막부를 일관하였다. 그러나 축소지향적인 도쿠가와 막부를 단순히 작게 한다는 것이라든지, 쇄국한다는 것이 아니라 꼭 가지고 싶으나 그대로는 내 손안에 꽉 쥘 수 없는 것을 ‘축소’시킴으로써, 그 가치, 본질을 획득, 소유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이나 중국대륙을 쥘 수 없어 그 가치, 본질을 류큐로 ‘압축’시킴으로써 확대지향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대한 일본인의 뜨거운 확대지향 팽창주의적 열망을 류큐군도 140여개 섬으로 축소 수렴하여 잠재워왔던 것이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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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언제 끝낼건가?"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③-제2차 일 제국주의 출항지, 류큐>
청나라는 류큐를 일본에 빼앗기지 말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했다 강효백 경희대 교수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의 진원지는 류큐의 윤택한 해상무역자금을 수백년간 흡수하며 세력을 길러온 사스마(薩摩· 현재 가고시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 메이지 유신의 두 주역, 역시 사스마 출신이다.
사이고는 메이지유신의 장본인이면서도 일본의 서구화에 회의를 느끼고, 사무라이 후예로서의 봉건적 향수를 떨치지 못한 채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국의 안정, 국력충실의 준비기간 없이 곧바로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오쿠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등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독일 등 구미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는 특히 통일독일을 이룬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그들 일행에게 들려 준 훈수,‘국제사회에서는 윤리도 없고 정의도 없다. 오로지 군사력과 관료제를 치밀하게 강화해나가는 길만이 부국강병의 첩경 ’이라는 대목에 깊은 감명를 받았다. 오쿠보는 독일에서 일본이 나가야 할 길을 발견하였다. 그는 서남 해역의 배후를 튼튼히 하는 류큐 병합 우선 노선을 주장하고 자유민권운동가들과 타협하면서 정국안정을 기하였다.
일본제국호의 첫 출항지 선정문제로 오쿠보는 마치 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류큐를 공격하여 이중속국화한 것처럼 류큐병탄론을 주장함으로써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흡사한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를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축출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도쿠가와보다 도요토미를 존경하고 있듯, 오쿠보도 사이고를 의리의 혁명가로 숭앙하고 있다.
1872년 오쿠보는 메이지유신 축하사절단을 파견하라고 류큐에 압력을 넣어 류큐 사절 일행을 동경으로 불러들였다. 류큐국왕을 일본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칙서를 내렸으며 류큐를 일본 외무성 관할하에 둔다고 발표하였다.
1875년 오쿠보는 외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松田道之)를 류큐에 파견해 청나라에의 조공을 금지할 것과 류큐가 맺은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맺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과 일본식으로 류큐의 법제를 변혁할 것을 강요하였다. 왕국의 수명이 경각에 달렸음을 직감한 류큐 왕은 1877년 4월, 청나라에 임세공(任世功) 등 3인의 밀사를 파견하여 원조를 청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주일 공사 하여장(何如章)이 “일본이 류큐를 취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조선일 것이다. 지금 일본은 서남전쟁 뒤인지라 피폐해 있고 청나라가 해군력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류큐에 함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일본을 축출하자”며 강경론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최고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은 먼 바다에 떨어진 몇 개의 섬들 때문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다며 류큐의 구조요청을 외면하였다. 절망에 빠진 류큐의 밀사 임세공은 베이징에서 류큐왕국이 있는 동남방을 향하여 삼배한 후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30년 터울, 일본의 류큐와 조선 병탄사]편에서 상술예정)
1879년 4월 4일은 오백년 동북아의 해상왕국, 류큐의 마지막 날이다. 이 날, 오쿠보의 직계 마쓰다는 ‘류큐 처분관’ 자격으로 군경 600여명을 이끌고 류큐의 수도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였다. 반발하는 류큐의 고관들을 모조리 체포 고문하고 막대한 보물과 문서를 약탈하였다. 류큐‘왕국’을 말소한 자리에 오키나와‘현’을 신설하였다. 류큐인은 이제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 메이지유신의 두 주역, 가고시마 출신의 오쿠보와 사이고는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오쿠보가 승리하여 류큐를 우선 병탄하게 된다.
그해 4월 30일 일본은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를 동경에 유폐하고 후일 후작 작위를 하사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의 구지배계층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들에 대해 토지와 조세체제 등 봉건적인 특권을 인정하고 신분에 따라 사은금을 제공하였다.
이듬해 미국의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그랜트(Ulysses S.Grant,1822~1885, 재임기간, 1869~1877)가 태평양을 건너 청나라로 왔다. 일본의 류큐흡수로 인하여 동아시아 세력의 균형추가 급속하게 일본으로 기울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랜트는 이홍장을 직접 만나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청나라가 류큐를 포기하여 두고두고 후회할 일은 말아야 한다고 극구 만류하였다.
그랜트는 이홍장에게 류큐의 북부는 일본이, 중부는 청일이 공동 관리하고, 남부는 청나라가 관할하는 이른바 ‘류큐 3분안’까지 제시하였으나 불발로 끝났다.([류큐와 미국의 대통령들]편에서 상술 예정)
결국 일본은 1592-1609년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출발하고 류큐로 잠입하였던 순서와는 거꾸로, 1879년 먼저 류큐를 병탄하여 오키나와현으로 일본 영토화한 것을 일대 전환점으로 삼아, 대륙에 대한 수천년 동안의 콤플렉스를 극복, 팽창주의 제국주의 노선으로 줄달음치게 되었다.
류큐를 병합한지 15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지 300여년 만인 1894년, 일본은 조선의 갑오동학혁명을 구실로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청나라로부터 이듬해 4월 대만과 팽호열도를 얻었다. 1905년에는 백년전만 하더라도 나폴레옹을 몰락시켰던 북극곰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일으켜 사할린 남반부를 얻고 만주(동북)의 조차권을 장악했다. 동북아 지역에 경쟁상대가 없어진 힘의 공백을 틈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대일본제국은 1910년 8월 29일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완전 병합하여 버렸다.
류큐에서부터 출발한 일제의 군홧발 행진은 끝없이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4년 일제는 중국의 산둥 반도를 공략하여 독일이 중국에서 점유하고 있던 권익을 그대로 승계하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 남만주 철도의 권리 기한을 다시 99년간 연장하고 동부 내몽골 남만주 일대의 권익을 획득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심양 북쪽 리우타오고우(柳條溝)폭파를 구실로 일본 관동군은 그해 11월 만주(동북)전역을 점령하였다.
1932년에는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괴뢰로 앉혀놓은 만주국을 건설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933년에는 내몽골의 동부와 허베이성의 동북쪽 르허(熱河)지방을 점령하여 만주국에 편입하고, 그해 5월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핑(北平, 지금의 베이징)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중국의 심장부까지 진출하였다. 이미 대일본제국의 판도는 해양을 뺀 육지면적만 치더라도 중국본토보다 훨씬 넓어졌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남부의 루가오챠오(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류큐에서 출발할 때부터 엘셀러레이터만 있었지 브레이크가 없었던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본토를 전면 침공하였다. 그해 11월 당시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여 1개월 여만에 30여만의 양민을 학살하는‘남경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1938년 10월까지 일본은 파죽지세로 산시, 산둥, 허베이, 상하이, 광저우, 우한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일제가 점령한 중국본토는 면이 아닌 선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돌파구를 찾던 일제는 인도차이나에 진격하여 중국에의 물자수송을 방지함과 동시에 남방진격을 근거지로 마련코자 하였다. 이에 미국은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석유수출 금지조치를 취하였다. 1941년 9월 6일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천황은 스기야마 하지메(杉山 元)육군참모총장에게 물었다.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언제 끝낼 자신이 있는가?”
“3개월쯤이면 태평양 전역을 끝장낼 수 있습니다.”
“그까짓 중국에서도 질질 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중국이 너무 넓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천황은 큰소리로 질책했다.
“태평양은 중국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이때 해군 참모총장은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1941년 12월 8일 대일본제국호는 마침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였다. 인류 전쟁사상 최대의 전쟁터로 화한 지구 최대의 바다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을 점령한데 이어 파푸아뉴기니, 미크로네시아 등 남태평양까지 점령지역을 확대해 갔다.
싱가포르 점령 당시 일제는 일본내지인은 물론 대만과 한국, 만주의 식민지인에게 싱가포르를 닮은 고무공을 선물하는 호기를 부렸다. 연전연승 파죽지세로 공격을 계속한 대일본제국의 최대판도는 과거의 로마제국의 극성기보다 훨씬 넓었다. 해양면적을 포함할 경우 징기스칸의 대원제국에 비견되는 광대무변한 것이었다.
이를 시간과 공간의 각도를 넓게 펼쳐 인류사를 조감해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각각 지중해와 대서양의 헤게모니를 얻기 위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과 대영제국과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전쟁처럼, 태평양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피지배민족을 탄압하는 대단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으로, 문화적 우월의식이 높은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물론 피지배민족의 자발적인 공감과 협조를 불러일으키기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류큐는 일본영토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자 2차 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은 원주민에게 집단자살명령을 내리는 등 만행을 저질러 류큐 전체 원주민의 3분의 1인 약 15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무렵 일제는 ‘오키나와를 불침항공모함’이라고 선언하였다. 약 40년 뒤인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일본이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한 불침항공모함이라고 공언하였다.)
그해 4월 1일 류큐의 오키나와를 점령당하자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은 붕괴하고, 4월 5일부터 스즈끼 간따로(鈴木貴太郞)의 항복준비 내각이 들어섰다.
이해를 돕기 위해 태평양전쟁을 축구경기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태평양의 키스톤(Keystone of the Pacific), 류큐를 확보함으로써 노쇠하고 둔중한 중국을 제치고 서태평양의 대표가 된 일본은, 역시 쇠락한 유럽제국을 제치고 서방세계최강대국으로 등극한 동태평양의 대표 미국과의 결승전을 갖는다. 센터서클 하와이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기선을 제압하였던 일본은 결국, 류큐를 상실하면서 전의를 잃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1.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이후로 일본이 탈취,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는 원상회복된다.
2. 만주, 대만, 팽호도 등 일본이 청으로부터 빼앗은 땅은 중국에 반환하여야 한다.
3. 조선은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에 의하여 자주 독립시킨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위의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제가 통치하였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만주,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은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나라 류큐왕국만은 돌아오지 않는 왕국이 되어 버렸다.
카이로 회담은 류큐 왕국을 부활시키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왜 장제스는 일본의 태평양 도서의 주권박탈 기산점을 1879년이라 하지 않고 1914년이라 하였는가.
2. 왜 장제스는 만주, 대만, 팽호도와 같이 류큐를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3.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이나 원상회복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는 필자가 19년 전에 제기하였던 의문이었다. [류큐와 미국의 대통령들]편에서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고자 한다.
<주요참고문헌>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을 일본”,『동양스승,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高良創吉, 『琉球王國』,東京: 岩波書店, 1993.
上村忠男, 『沖繩の記憶/日本の歷史』,東京: 未來社, 2002.
高之國&8729;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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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 해양대국화는 한국 해양을 자르는 가위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④-제3차 불침항공모함 출항지, 류큐>
해상제국 중국 꿈 이뤄지면 우리나라 제주-이어도-7광구 관할권 손실 강효백 경희대 교수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1876년 일본정부는 모든 류큐 주민의 중국여행을 엄금하였다. 그해 12월 어느 날 밤, 오키나와 나하항의 후미진 부두 어귀에는 작은 어선 한 척이 닻을 올렸다. 어선에는 초라한 어부행색의 ‘특별한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3인의 밀사, 류큐 마지막 왕의 밀명을 받은 향덕굉(向德宏), 임세공(林世功), 채대정(蔡戴程)이었다.
어선의 항로는 희한했다. 이렇다 할 풍랑도 없었는데 처음에는 북동쪽 일본으로 향했다가 닷새쯤 되던 날, 선수를 반대편으로 슬그머니 돌려 남서쪽 중국으로 한 열흘간 항행하였다. 그렇게 어선은 닷새는 북동쪽으로, 열흘은 남서쪽으로 항행하길 반복했다.
어선은 이듬해, 1877년 4월에야 푸젠(福健·타이완의 맞은편에 위치한 중국 남동부의 성) 해안에 상륙하였다. 3인의 밀사는 하선하자마자 곧장 푸젠성 순무(巡撫·성 최고행정책임자)에게 류큐왕의 친서를 올렸다. 거기에는 류큐가 일본의 사실상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실정은 누락한 채 다만 일본이 류큐가 청나라에의 조공을 방해하고 있으니 청나라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푸젠성 순무는 6월 14일 마땅히 류큐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베이징 조정에 상신하였다.
류큐왕의 밀서를 받은 청나라 조정은 난감했다. 당시 청나라는 자국의 방위에도 힘겨웠다. 북으로는 러시아와의 영토갈등으로, 남으로는 월남문제로 인한 프랑스와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홍장을 수뇌로 한 양무파들은 평화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 하였다.
초기 양무파의 외교구상의 골간은 ‘연일항아(聯日抗俄)’ 즉 ‘일본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남침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이홍장은 미약한 중국의 해군력으로 류큐를 구하려는 것은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동중국해 바다 건너 조그만 섬들보다는 광활한 북쪽과 남쪽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 훨씬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청정부는 류큐에 원군을 파견하지 않기로 최종결정을 내렸다.
철석같이 믿었던 종주국의 ‘류큐 포기’라는 비보를 전해들은 향덕굉과 임세공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두 밀사는 머리를 삭발하고 탁발승으로 변장, 텐진을 향해 떠났다. 텐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이홍장의 관저 대문 앞에 꿇어 앉아 혈서를 썼다.
“류큐 신민들은 살아서도 일본인으로 살 수 없고, 죽어서도 일본의 귀신이 될 수 없다. 대청제국은 조속히 출병하여 류큐를 구해 달라.”
두 밀사는 며칠을 단식하며 빈사의 조국을 구해 달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간혹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지켜볼 뿐, 굳게 닫힌 이홍장 관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일주일째, 임세공은 남동쪽 머나먼 류큐 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 후 비수로 심장을 찔러 자결하였다.
류큐왕이 사신을 청나라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정부는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입안에 넣은 눈깔사탕 같은 섬나라를 목구멍 속으로 삼켜 완전한 자기 것으로 삭혀버려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879년 3월 27일, 일본정부는 내무대신 마쓰다에게 500여 명의 병력을 딸려 류큐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도성인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고 4월 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는 포고령을 전국에 포고하였다. 연이어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와 왕자들을 도쿄로 압송하였다.
1875년 류큐가 ‘마쓰다 10개항’으로 사실상 일본에 합병된 지 30년이 되던 해,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가 되었다.
1877년 류큐 상태왕의 3인의 밀사가 실패한지 역시 30년만인 1907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일제의 무력적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이를 막아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준은 현지에서 분사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일제에 역이용 당하여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류큐의 청나라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류큐를 완전히 병탄하였던 것처럼, 헤이그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반도를 병합하여 버렸다.
이처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류큐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공간(지리)에서 되풀이된 시간(역사)의 반복성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그 반복성의 색조가 지나치게 어두워 슬프다.
* 뱀의 발(사족): 필자가 역사의 반복성을 발굴, 비교 고찰하려는 목적은 21세기 태평양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위에서 점검해보고, 밝은 미래를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교훈을 얻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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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 해양대국화는 한국 해양을 자르는 가위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④-제3차 불침항공모함 출항지, 류큐>
해상제국 중국 꿈 이뤄지면 우리나라 제주-이어도-7광구 관할권 손실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1.22 09:39:25)
‘가오리연 일본’의 꼬리, 류큐
가오리연을 날려본 적이 있는가? 가오리연의 비밀은 꼬리에 있다. 가오리연의 특징은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꼬리가 균형을 잡아 주면서 바람이 꼬리를 타고 흐르게 하여 하늘 높이 띄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가오리연’이라면 류큐는‘가오리연의 꼬리’이다. 일본은 1500여㎞의 기나긴 류큐 군도를 확보한 그만큼 오르막(팽창)으로 치달았고 류큐에 대한 일본의 권력이 손상을 입은 그만큼 내리막(축소)에 접어들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지 류큐 미군정시대는 근대 일본사에서 ‘축소 일본’시기였다.
2차 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자 류큐는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미군정하에 들어갔다. 미국의 류큐 분리의 근거에는 류큐 군도가 원래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보에서 류큐 군도는 역사학적, 민족학적으로도 일본의 고유한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이 섬들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맥아더는 점령지 일본 당국에게는 류큐를 미군기지화하면 일본이 재군비를 하지 않아도 방위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류큐 기지화와 일본의 전쟁포기 및 군대보유금지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의 격화, 6.25전쟁 과정에서 공군기지로서의 류큐의 결정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류큐는 태평양의 키스톤(keystone)으로서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핵심적인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미일 이중종속지 류큐
1952년 4월 발효된 대일강화조약 제3조에 규정된 류큐의 법적 지위는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류큐의 잠재주권(residual sovereignty)은 여전히 일본에게 있었으나, 미국의 군정을 받는 변칙적인 이중 종속의 지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미국이 류큐 주민에 대한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영토라고 하기 힘들었다. 잠재주권을 일본에게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합병한 영토도 아니었다. 류큐는 아주 새로운 유형의 점령지이자 식민지였다. 미군정하의 류큐 주민 역시 매우 애매모호한 지위를 지녔다.
류큐는 미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었지만 류큐 주민은 미국 시민권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본국적자도 아니었으며 ‘류큐왕국’으로 원상회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독립국 류큐’의 국적자도 아니었다. 류큐 주민이 일본 본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여권인 도항증을 지참하여야 했다. 도항증에는 국적표시는 없고 류큐 군도 거주자라는 괴이한 법적 신분이 기재되었었다.
미국이 류큐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을 새로운 가상 적국으로 설정한 세계전략에 따라 류큐를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해상 장벽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1953년 당시 닉슨 미국 부통령은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는 한, 미국은 오키나와(류큐)를 보유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1954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를 무기한으로 보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자 2차 대전 후 정점에 달했던 미국의 헤게모니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아래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미국과 일본의 역학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미일간에 군사 경제적 역할분담을 조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1969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는 아시아인 손으로’라는 유명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연이어 닉슨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총리는 한국의 안전이 일본 자체의 안전에 긴요하다는‘한국 조항’과 함께 류큐의 일본반환을 협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일본에 류큐를 반환하는 대가로 아시아에 대한 짐의 일부를 일본이 떠맡기로 한 것이다. 류큐 반환협상은 8년간이나 일본 총리를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의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마침내 미국은 1972년 5월 15일, 류큐 군도와 주변의 광대한 해역을 통째로 일본에 돌려주었다.
여기서 류큐 군도를 잠시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이른바 ‘북방 4도’와 비교해보자. 러시아가 현재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하보마이,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후 등 4개의 섬은 류큐처럼 독립왕국이었거나 이중 종속국이었다는 영욕의 역사가 없으며 19세기 말 침략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점령지였다. 북방 4도에 비하면 일본의 입장에서 볼때, 가히 횡재라 할 만한 호박이 그것도 140여개씩이나 넝쿨째 현재 일본 전체해역의 30%이상에 해당하는 광대한 해역(약 140만㎢)이 일본의 품속으로 굴러들어왔다.
그러나 또 다른 이면을 톺아보면 현재까지 류큐의 미군기지가 반환된 예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여전히 류큐 전체 면적의 약 10%(오키나와 본도 면적의 약 20%)가 미군기지화 되어 있다. 본토에서 미군 기지는 축소되었지만 류큐에서는 거의 변함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류큐에 주둔하는 주일 미군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일본 국토(뭍)면적의 0.6%에 해당하는 류큐에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었다. 즉 류큐 군도의 핵심 부분은 여전히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미국 영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에 따라 일본 전토를 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지 사용과 기지 운용의 특권이 보장된 류큐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이러한 기지화 방침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센카쿠를 둘러싼 일-중 쟁탈전
1972년 류큐를 환수받으면서부터 팽창지향성 대외정책에로의 전환에 탄력을 받은 일본은 그해 9월, 미국보다 앞서 대만과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중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때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유명한 동양학자 티보르 멘데는 “일본과 중국이 미래를 공유하게 되는 때, 그것은 서구로서는 콜럼부스의 신대륙발견에 결코 뒤지지 않는 큰 사건이고, 백인의 우월성이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경탄하였다.
당시 서구 학자들은 일본과 중국이 서로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일본의 활력과 기술이 중국의 신문명 노력과 결합된다면, 서구사회에 중대한 교훈을 주는 또 한 번의 문화적 대격동을 야기시켜, 전혀 새로운 사회도덕 관념이 형성될지도 모른다고 예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지역적으로 아시아에 속해있기는 하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근본적으로 미흡하고, 아시아의 공동발전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을 게을리함을 간과한 ‘1+1=2’라는 단순한 산술적 계산이라고 할 수 있다.
중일수교 교섭당시 중국은 류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우선 류큐 군도의 맨 남쪽에 있는 센카쿠(중국명, 다오위다오) 영유권 문제가 그것이다. 센카쿠는 류큐의 중심섬인 오키나와 서남쪽 약 400km, 중국대륙 동쪽 약 350km, 대만 북동쪽 190km 동중국해상에 위치한 8개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고 총면적은 6.3㎢이다.
현재 일본이 점유하고 있으나 중국, 대만, 홍콩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 해역은 1895년 청·일전쟁 승리이후 일본이 청으로부터 대만의 부속도서로서의 하나로 할양받으면서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귀속되었다가 대일 강화조약 체결시 미국으로 이양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센카쿠에 대한 이렇다 할 분쟁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1969년 유엔이 센카쿠 해역의 석유부존 가능성을 발표한 이후 중국과 대만 측에서 영유권 주장을 제기하였다.
센카쿠 영유권 분쟁에서 일본과 중국의 주요 논거는 이렇다. 일본의 주장에 의하면 19세기 말까지 무주지였던 센카쿠를 일본이 먼저 발견하고 1895년 오키나와현에 정식 편입하였다. 2차대전후 대일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미군 관할하에 있던 것을 1972년 오키나와 반환으로 되찾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다.
중국의 주장에 의하면 센카쿠는 명나라시대에 중국이 처음 발견한 중국 고유영토였다. 청일전쟁후 대만의 부속도서의 하나로서 일본에 강제 할양되었으며 2차대전후 중국의 고유영토를 일본이 불법적으로 미국에 이양했으며 미국의 센카쿠를 포함한 오키나와 반환은 중국 영토에 대한 미일간의 불법적인 밀실 거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센카쿠를 연(鳶)으로 비유하도록 한다.
일본이 가오리연이라면 류큐 군도는 가오리연의 긴 꼬리이고 센카쿠는 꼬리중의 맨 끝 부분이다. 그런데 중국은 센카쿠가 대만이라는 ‘방패연’에 달린 머리줄이었던 것을 일본이 훔쳐내어 자기네 가오리연 꼬리에 덧붙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중일 국교 정상화는 센카쿠 문제를 보류해 둔 채 체결되었다. “같은 점을 먼저 찾아내고 다른 점은 일단 그대로 접어두자” 라는 구존동이(求存同異)와 센카쿠의 영유권 귀속문제를 후세에게 맡기는 ’차세대 해결론‘을 채택하여 분쟁해결을 후세에게 맡기는 보류전략을 선택하였다.
중국은 1969년, 류큐 해역의 1만분의 1도 안되는 북방의 영역, 즉 우수리 강 가운데 섬인 진바오(珍寶·소련 명칭‘다만스키’) 섬을 위해 같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일전을 불사했지만, 여전히 드넓은 태평양을 향하는 출구 류큐 군도와 그 광활한 해역의 관할권 제기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러나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센카쿠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간의 마찰은 지속되고 있다. 1978년, 1988년, 1996년 3차에 걸쳐 일본의 극우단체인 ‘일본청년사’가 센카쿠에 등대를 설치하여 일본의 지배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행위에 대해 중국, 대만 및 홍콩에서 대대적인 일본 규탄시위 및 항의가 발생하였다. 1996년 9월에는 센카쿠 인근 해역에서 일본의 등대설치를 항의하는 한 홍콩의 시민단체 회원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중국은 1998년 6월 남사군도, 서사군도 및 센카쿠 해역을 포함하는 <배타적경제수역 및 대륙붕법>을 발표하여, 일본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선박과 항공기의 센카쿠 영해 진입은 다반사가 되었다. 특히 작년 9월 7일에는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상순시선이 충돌하면서 중일 간 심각한 외교 분쟁이 벌어졌다.
센카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국내법에 따라 엄정히 처리하겠다”며 중국인 선장을 구속했다. 그러자 중국정부는 고위급 회담 전면 중단, 일본 관광 취소, 희토류 수출 중단 등으로 일본을 압박했고, 일본은 결국 선장을 조기 석방했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중국에서는 대규모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환치우시바오>(環球時報)를 비롯한 중국 각종 언론매체에는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의 독립 또는 중국에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특집기사와 칼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일 양국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이유는 센카쿠를 포함한 류큐 해역의 전략적 중요성과 해양자원의 가치가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는 중국 군사력의 태평양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이며, 일본에게는 중국대륙의 대양에로의 팽창을 봉쇄하는 전략적 방어체인이 된다. 200해리 EEZ확보를 통한 어마어마한 용적의 해양과 이를 통한 해저자원의 자원 확보 및 해상교통로와 관련된 사활지역인 것이다.
더블베드 면적의 바위섬으로 일본 육지면적의 1.1배 확보
여기에서 보다 거시적 관점으로 조망하여 보자. 시공을 일본이 류큐를 반환받은 1972년으로 되돌려 본다. 그 해는 현대 세계사와 국제관계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는 한해였다. 그 해부터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친 방위력 정비 계획을 통하여 획기적인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다. 류큐 군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방위 체제 정비와 육해공군의 노후 장비 갱신을 위해 신예 장비를 확충하기 시작하였다.
1879년 류큐를 합병한지 15년 후 절대군주제 일본제국은 청일 전쟁을 일으켜 대만을 얻었다. 그렇다면 1972년 류큐를 회복한지 15년 후에 현대적 민주국가이자 입헌군주제 일본은 무엇을 했을까? 1987년 일본은 방위비의 GNP 1퍼센트 억제선을 철폐하고 본격적인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잠수함, 미사일, 항공기 등 공격형 무기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목표로 다시 무섭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일본은 총 한발 쏘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넓은 해역을 차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바로 오키노토리시마(沖の鳥島,중국명; 沖之鳥礁). 오키노토리시마는 원래 만조 때는 바위섬 거의 전부가 해수면에 잠기는 암초였다. 다만 가로 2m, 세로 5m, 높이 70cm 정도의 바위만 2개 수면에 드러나는데 해면에 노출되는 면적은 10㎡(독도면적의 약 18,000분지 1)가 채 되지 않는 ‘현초(顯礁; 드러난 암초)’였다.
그 더블베드 넓이만한 노출 부위마저 파도가 조금만 세게 몰아쳐도 잠겨버리곤 하는 현초를 일본 정부는 1987년 11월 26일부터 1989년 11월 4일까지 바위주변에 철제블록을 이용, 지름 50m, 높이 3m의 원형 벽을 쌓아올리고 그 내부에 콘크리트를 부어 파도에 깎이는 것을 막아 인공 원형섬으로 재탄생시켰다.
일본은 이를 기선으로 하여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설정함으로써 오키노토리시마의 EEZ 면적은 일본 국토 면적(38만 ㎢)보다 넓은 약 42만㎢나 된다. 더 나아가 일본은 오키노토리사마 주변을 매립하여 제트기 이착륙이 가능한 활주로도 만들어 해양리조트를 건설할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다. 중국은 현재까지 오키노토리를 ‘섬’이 아닌 ‘현초 또는 바위(岩)’에 불과하다며 이를 기선으로 한 EEZ 설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오키노토리에 가한 행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해양제국주의 전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이 일본의 주장대로 현초가 아닌 섬이라고 해도 유엔해양법 협약 제121조 3항에는 ‘인간이 거주할 수 없거나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유지할 수 없는 암석은 배타적 경제수역(EEZ)이나 대륙붕을 가지지 아니한다.’는 유엔 해양법 협약 제121조 3항에 따라 기점으로 삼을 수 없다.
국제사회의 비판에 아랑곳 하지 않고 1996년 일본은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법」을 제정하면서 류큐 군도 해역과 오키노토리시마 해역, 그리고 태평양 망망대해상의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해역(약 43만㎢) 등 총 447만㎢의 관할 해역을 선포했다.
일중 해양대국화는 한국의 해양을 자르는 가위인가
그동안 독도에 대한 망발을 일삼던 일본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망언(妄言)에서 망동(妄動)으로 더욱 공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도발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2008년 4월 일본은 중학교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표기하였다. 당시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은 일본 정부에 신중한 판단을 당부(request‘부탁’의 외교적 표현)했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인데 일본정부에 강력하게 ´항의(protest)´를 했어야지 왜 ‘부탁’만 했는가. 게다가 지난해 3월 일본은 모든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하여 독도와 동해를 ‘다케시마’와 ‘일본해’로 만들기 위한 야욕을 갈수록 현재화하고 있다(추후 상술 예정).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은?
섬나라 일본은 바다를 닮아 퍼지기를 좋아하고 늘 움직인다. 자기 확대를 좋아하고 자기 한정을 싫어한다. 21세기 일본은 더욱 면밀하고 세련된 제국주의, 해양제국주의(Maritime Imperialism)로 줄달음 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뭍(육지)만 중시하던 중국이 물(해양)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어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실크로 포장된 중화제국의 해양대국화로 성큼 성큼 나아가고 있다.
현재 중국 군사전략가들은 과거 서구 열강에 침략 당했던 것이 대양 해군의 부재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중국은 항공모함을 비롯해 잠수함과 이지스함 등의 건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2014년까지 2척의 항공모함을, 2020년까지 5척의 항공모함을 운용하는 체제를 구축할 방침이다. 지금 중국의 의도는 중국 군함이 류큐 해역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군의 방위선을 태평양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 4월 중순에는 10여척의 군함과 함정탑재 헬리콥터 수 십대, 수 미상의 잠수함으로 구성된 중국해군함대가 일본 당국에 사전 통고도 없이, 센카쿠 영해와 류큐 해역을 뚫고 오키마토리시마 해역까지 진출하여 일본조야를 경악하게끔 하였다.
만일 해상제국 중국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제주 해역과 이어도 해역, 그리고 7광구에 대한 우리의 관할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것임에 틀림없다. 도서국가로서 생래적 팽창주의자인 일본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차라리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의 대륙성국가 중국이 우리에겐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식탐이 유난히 강한 이들 양대국의 참을 수 없는 팽창욕구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도 없지 않다. 즉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동서에 각각 위치한 일본-중국의 해양제국주의노선은 한국의 해역을 잘라내 삼켜버리는 가위의 양날이 될 수도 있다. 냉철한 현실인식의 기초 위에서 주도면밀하면서도 담대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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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5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일본의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류큐를 방문하여 “오키나와(류큐)의 복귀가 실현되지 않는 한, 일본의 전후(戰後)는 끝나지 않는다.”라고 성명했다.
2)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총통은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30주년 대담(오키나와 타임즈)에서부터 최근 각종 일본매체와의 인터뷰에서까지, 센카쿠 열도를 일본 영토라고 계속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논거는 센카쿠 열도가 오키나와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결국 일본 영토. 중국이 아무리 영유권을 주장해도 증거가 없으며 중국의 주장은 국제법적 근거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중국과 대만 언론은 리덩후이의 부계혈통이 일본인 경찰이었다는 항간의 의혹을 기정사실화하며 리덩후이를 악랄한 친일매국노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오키나와 타임즈] 2002-09-24. 중국의 [中&22269;日&25253;] 2010-11-2, 대만의 [中央日報] 2011-01-15 등 참조
3)독도면적 187,554㎡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48656참조. 국내 학계 일각에서는 오키노토리보다 18,000여배나 더 넓은 독도가 섬(island)이 아닌 바위(rocks)라며 독도를 기선으로 하여 영해 및 배타적경제수역을 설정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한 비판을 유보한다. 그 대신 대한민국의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일본의 콘크리트를 들이부어 건설한 인공섬 오키노토리시마의 사례를 참고로 독도항만과 공항, 독도촌 건설 등에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4)금년 벽두(2011년 1월 3일)에 일본정부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금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미나미토리시마 인근 해역에서 망간단괴, 망간 각 개발 사업에 착수하였다. [중앙일보] 2011-01-04 참조.
5)[마이니찌(讀賣)新聞)], [요미우리 (每日)新聞], [아사히(朝日)新聞)],[산케이(産經)新聞)] 2000.4.21자 참조
<주요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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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8729;전경수&8729;이지원 편저, 『기지의 섬, 오키나와』, 서울: 논형, 2008.
上村忠男, 『沖繩の記憶/日本の歷史』,東京: 未來社, 2002.
廉德珪, 『“大國” 日本與中日官階』, 上海:上海新世紀出版社,2010.
高之國&8729;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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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류큐 국기는 ´태극기´였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⑤-이중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한국의 빼어남을 모아놓고 중국과는 보차 관계, 일본과는 순치 관계"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2.05 12:31:20)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잊어버린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다.
잊혀진 왕국 류큐의 역사를 대체로 구분하면 5단계로 나누어진다.
1.해상무역 왕국의 황금시대(14세기~1609년)
2.중국-일본에 의한 제1차 이중 종속시대 (1609년~1879년)
3.제1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879년~1945년)
4.미국-일본에 의한 제2차 이중 종속시대(1945년~1972년)
5.제2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972년~?)
해상왕국, 류큐의 황금시대
류큐는 독립왕국이었다. 류큐는 지리 역사적 풍토의 특수성에 조성된 고유한 전통과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아름답고 풍요로운 해상왕국이었다.
규슈와 타이완 사이의 태평양에 점점이 펼쳐있는 류큐 군도의 섬들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의 형태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섬에는 저마다 안사(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족장의 지위는 서로 평등하였고 이들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었다.
12세기경 류큐 군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 산남(山南), 중산(中山), 산북(山北)의 세 왕조가 탄생하였다. 류큐의 ‘삼산시대’ 또는‘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삼국 중에는 오키나와 섬 가운데 위치한 중산왕국의 국력이 최강이었고 산북왕국이 최약체였다. 류큐의 삼국시대에는 류큐 군도 북부의 아마미제도와 남부의 사키시마제도는 미개한 상태였다.
1406년 중산왕 찰도(察度)의 왕세자 무녕(武寧)은 재상 파지(巴志)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파지는 1416년에는 산북왕국을, 1429년에는 산남왕국을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슈리(首里)성을 수도로 정했다. 조선의 세종대왕 시절에 해당하는 1430년, 명나라 선종은 파지에게 상(尙)씨를 하사하여 그를 중산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역사는 상파지를 ‘제1 상씨왕조의 개창자’로 부른다.
제7대 상덕(尙德)왕은 쿠메지마, 도쿠노지마 등 오키나와 주변의 열도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1469년에 발생한 궁정 쿠테타에 의해 참살당하였다. 이듬해 어쇄측관(御锁侧官·지금의 재무부 장관)에서 왕으로 추대된 금원(金圆)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명나라에 부친상을 입었다고 보고하였다. 1472년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금원을 상원(尙圓)으로 성을 바꿔 부르고 그를 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류큐왕국사의 ‘제2 상씨왕조’가 개창된 것이다.
제3대 상진(尙眞)왕의 재위기간(1478~1525)은 류큐의 황금시기였다. 상진왕은 북으로는 토카라 열도, 남으로는 미야코와 아에야마 열도를 정복하여 류큐 군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또한 상진왕은 류큐의 품관제도, 신관제도, 조세제도 등을 정비하고, 순장의 악습을 폐지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 류큐 군도의 족장들을 슈리성에 거주하게 하고 사인(私人)의 무기소지를 금지하는 등 류큐의 정치경제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한 몸에 겸했다고나 할까. 상진왕은 동아시아 해상왕국 류큐의 최고 명군이었다.
류큐는 중국과 일본,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과의 중개무역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고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류큐 무역선의 활동범위는 조선의 부산포, 중국의 푸젠과 광둥, 일본의 규슈, 안남(베트남), 샴(타이), 자바(인도네시아), 루손(필리핀), 말라타(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전역의 해외무역을
주름
잡게 되었다.특히 류큐는 명나라에 2년에 1회씩의 조공무역을 하였는데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무역을 행한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횟수이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중국과의 무역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중국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중개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조선을 사랑하였던 만국의 가교, 류큐왕국
지금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는 슈리 왕궁의 정전에 걸려있던‘류큐만국진량(琉球萬國津梁·류큐 만국의 가교)’동종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문이 세겨 있다.
“류큐는 남해에 있는 나라로 삼한(三韓·한국)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중국)과 밀접한 보차(輔車·광대뼈와 턱)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도 떨어질 수 없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 관계이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 솟아난 봉래도(蓬萊島·낙원)이다. 선박을 항행하여 만국의 가교가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는 온 나라에 가득하다.(琉球国者,南海胜地而钟三韩之秀,以大明为辅车,以日域为唇齿,在此二中间涌出之蓬莱岛也,以舟楫为万国之津梁,异产至宝)”
동종의 명문이 한-중-일 동북아 삼국 중에서도 조선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데에서 류큐는 다른 나라를 좀처럼 침략할 줄 모르는 평화애호국인 조선에 대하여 동병상련이라 할까, 각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큐가 조선보다 양국간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개국 원년 1392년, 류큐 국왕의 명을 받을 공식 사절단이 조선을 예방하여 태조 이성계를 알현하였다. 태조는 사절단대표에게 정5품, 수행원들에게 정6품에 준하는 대우를 베풀었다. 류큐는 조선을 최초로 승인한 국가인 셈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류큐 공식 사절단의 조선방문은 40회인데 반하여 조선 사절단의 류큐방문은 3회로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도 양국의 각종 사료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류큐와의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재위기간 1469~1494)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을 류큐 왕국에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슈리성 아래 있는 연못가의 한 건물이 대장경을 보관하던 장경판고였다.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학자중의 한 사람인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류큐는 땅은 좁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바다에 배를 타고 다니며 무역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다. 서쪽으로는 남만(동남아시아)및 중국과 통하고, 동으로는 일본 및 우리나라와 통하고 있다. 일본과 남만의 상선들도 류큐 수도에 모여든다. 류큐 백성들은 수도 주변에 점포를 설치하고 무역을 한다'고 서술하였다.
또한 허균의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며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소개되는 류큐 남서부 아에야마(八重山) 민란의 주인공이며 민중 영웅인 적봉(赤峰) 홍(洪)가와라와 동일한 인물임을 주장하는 학설마저 있다(설성경, <홍길동전의 비밀>, 서울대학교출판부,2004년). 설성경 교수는 홍길동은 연산군에 의해 비밀리에 석방되었으며 홍길동이 진출한 율도국이 바로 지금의 류큐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
예로부터 조선과 류큐가 이처럼 밀접한 교류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양국의 뛰어난 해상운송능력과 쿠로시오해류 덕분이었다. 계절풍을 타고 동남아로 남하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류큐에 도착할 수 있고, 조난당한 조선인들이 류큐에 많이 표착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게다가 뛰어난 해상왕국이었던 신라와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이 동남아 항해의 출발점이 될 류큐에 주목을 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조선과의 무역에 류큐는 적극적이었다. 중국과 동남아 각국의 물산을 매매하는 시장으로서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부산포로 향하는 류큐 무역선의 항해 루트는 ‘왜구’가 출몰하는 바다였다. 류큐는 15세기 말엽에 방침을 바꿔 조선에 직접 무역선을 파견하지 않고 규슈와 대마도의 상인을 매개로 한 간접 무역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들이 류큐의 사신이라고 사칭하며 조선과의 무역을 요구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류큐 사이의 직접 무역은 빈껍데기만 남고, 양자 사이에 왜구가 끼어드는 형태가 되었다.
‘아빠 나라, 중국, 엄마 나라, 일본’
류큐의 황금시기는 1609년 도쿠가와 막부의 사주를 받은 사스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 2011.1.26-2.1. 화산이 폭발적 분화를 일으키고 있는 지역)이 류큐를 침략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609년 3월 22일 사스마 번주 시마즈는 3천여 병사를 100여척의 함선에 싣고 가와야마(川山)항을 출항하였다. 4월 1일 오키나와에 상륙하고 4월 5일 슈리성을 함락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 속에서 무사 안일의 단잠을 자고 있던 류큐는 일본의 무력침략에 저항다운 저항을 못해보고 불과 닷새 만에 정복되어 버렸다. 5월 17일 사스마군은 상녕왕과 왕자와 관리들 백 여명을 포로로 잡아 사스마 번으로 끌고 갔다. 사스마 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당시 류큐에 군량징발 요구를 하였는데 류큐가 이를 거부하자 사스마번이 대신 지불한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침략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류큐를 정벌해서 얻은 이익으로 사스마가 임진왜란과 일본내전에 참전시에 들어갔던 군비와 손실을 충당하려는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중국과 류큐 사이의 무역이익을 갈취하려는 것이었다.
상녕왕은 사스마 번에 끌려간지 2년 만에 돌아와 복위되었지만 그때부터 류큐는 왕년의 해상독립왕국 다운 면모는 사라지게 되었다. 류큐의 역사서 <구양>(球陽)은 '사스마 번은 류큐에 재번봉행(在番奉行)이라는 감독관을 슈리성에 주재하게끔 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농지를 측량하고 감독관 휘하에게 분배해주고, 사스마번에 막대한 세금과 공물을 바칠 것과 사스마의 허가없이 제3국과의 무역을 금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사스마번의 괴뢰국으로 전락하게 된 류큐는 1693년 토카라지마 등 류큐 북부 5개 섬을 사스마번에 할양하였다. 현재 류큐 군도 최북단의 섬들인 토카라 제도의 행정구역이 오키나와현이 아니라 가고시마현에 속하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결국 류큐는 ‘아빠 나라 중국’, ‘엄마 나라 일본’을 옹알거려야 연명할 수 있는 병든 병아리처럼 쇠약한 이중속국이 되어버렸다. 중국은 책봉체제하에서 류큐를 상징적으로만 지배했으나 경제적으로 수탈하지 않았던 반면, 일본은 사스마번을 통하여 가혹한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류큐 주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사스마번은 류큐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네지 조수(羽地朝秀 1617~1676)를 비롯한 관변학자들에 명하여 류큐와 일본이 고대로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류큐인은 일본인과 동일한 대화민족이라는 논조, 즉 일본과 류큐는 조상이 같다는 ‘일유동조론(日琉同祖論)’에 근거한 류큐 국사 <중산세감>(中山世鑑)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스마번은 중국 몰래 류큐의 무역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 황제가 파견한 ‘천사(天使·천자의 사절)’가 류큐왕을 책봉하기 위하여 류큐로 올 때마다 그 섬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흔적을 감추도록 하였다. 청나라는 말엽에 이르기까지도 류큐가 오래전에 이중 속국이 되어버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1847년 청나라 정부는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尙泰)를 책봉하기 위하여 조신(趙信)을 책봉사로 파견하였는데 조신이 보고한 <속유구국지략>에는 일본이 류큐를 실제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페리제독과 미-일, 미-류 화친조약
1854년 3월, 미국의 페리Matthew C. Perry)제독이 가나자와에 흑선 함대를 정박시켜놓고 에도 막부와의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류큐의 나하 항을 개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 측은 ‘류큐는 아주 멀리 떨어진 독립국가로서 일본은 나하 항의 개방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둘러대었다.
그러자 1854년 7월 페리제독은 직접 류큐의 나하항으로 예의 흑선 함대를 몰고 왔다. 결국 류큐 정부는 페리 제독과 나하항을 개항한다는 내용의 영문과 중문으로 각각 기재된 ‘미-류(琉)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류큐는 완전한 독립국의 자격으로서 미합중국정부와 국제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류큐는 역시 완전한 독립국의 자격으로서 1855년에 프랑스, 1859년에 네덜란드, 1860년에 이탈리아와의 수호조약을 연이어 체결하였다.
류큐가 체결한 국제조약들에 어떠한 이의표시도 하지 않던 일본은 1871년 청나라에 대만에서의 류큐인 살해사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면서 류큐인은 일본인이고 류큐는 일본영토라고 공언하였다. 1874년, 메이지 유신정권의 우이를 쥐고 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정부에 외교수단만으로 류큐의 병탄이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프랑스 국적 법률고문 바나쌍의 자문을 받은 오쿠보는 만국공법(국제법)상의 조약은 얼마든지 왜곡 가능한, 즉 해석하기 나름인 종잇조각일 뿐이며, 무력에 의해서만 류큐의 완전한 정복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오쿠보의 변설은 메이지정부의 제국주의 대외팽창노선의 일환으로 최우선 채택되었다. 류큐는 일본제국주의의 첫 먹잇감이 된 것이다.
1875년 초, 오쿠보는 류큐의 3정승격인 삼사관들을 도쿄로 소환하여 류큐에 대한 천황의 처분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오쿠보는 삼사관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류큐의 정치제도를 메이지 유신의 폐번치현식으로 뜯어고칠 것과 청나라에 조공을 금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삼사관들은 오쿠보의 요구는 류큐에 대한 자살명령이나 다름없다고 판단, 즉답을 피하고 류큐로 돌아가 류큐왕에게 보고한 후에 왕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사관들의 보고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류큐왕은 시일을 최대한 끄는 지연책을 쓰는 한편 청나라에 비밀리에 조공을 계속 바칠 것을 주문하였다. 류큐왕은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지속해야만 장래 류큐가 청나라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일제의 첫 먹잇감이 된 류큐, 30년 후 대한제국
일본은 류큐의 이러한 지연책을 그냥 두지 않았다. 1875년 7월, 일본은 내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를 류큐에 파견하여 이른바 ‘마쓰다 10개조항’을 반포하게 하였다.
1. 2년에 1회 청에 조공을 바치는 것과 청 황제 즉위식에 경축사절을 파견하는 것을 금함.
2. 류큐 번왕의 즉위시에 청의 책봉을 받는 것을 금함
3. 류큐는 메이지의 연호를 따라야 하고 일본의 의례를 받을 것
4. 형법은 일본이 정하는 바대로 시행하여야 하며 2-3명의 전문가를 도쿄에 파견하여 학습할 것
5. 류큐번의 내정을 개혁할 것, 류큐 번왕은 1등관으로 보하고 관제를 개정하여 칙임, 진임, 판임 및 등외관의 명목을 정할 것
여기에다 마쓰다는 자신의 설명서를 덧붙여 여러 조항을 증가시켰다.
6. 청의 연호를 따른 것을 금한다.
7. 류큐 번왕은 반드시 직접 정책을 집행하여야 하고 섭정할 수 없다.
8. 중국 푸저우(福州)에 있는 류큐 영사관을 폐지하고 류큐의 상업을 일본 영사관의 관할하에 둔다.
9. 류큐 번왕 자신이 직접 도쿄로 와서 메이지 천황의 은혜에 감사를 표한다.
10. 일본은 류큐 번내에 일본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
‘마쓰다 10개 조항’이 공포되자 류큐의 각지 주민들은 격분하여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상태왕은 충격에 빠져 며칠간 실어증에 시달려야 했다. 류큐측 삼사관과 일본측 마쓰다간의 논쟁의 귀결점은 류큐가 계속 중국과 일본의 이중종속국 지위를 유지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의 훈령을 받고 온 마쓰다측이 물러날 리 없었으며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류큐 측은 청의 책봉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중-일 양국을 부모의 나라로 여겨온 류큐왕국의 기틀을 갑작스레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이라 하며 난색을 표하였다. 연호에 관해서도 대내적으로는 일본연호를,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온 것이 관례이므로 갑자기 고칠 수는 없는 일이며, 류큐왕의 도쿄행도 왕자가 대행토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류큐의 지배층은 마쓰다 10개조항의 수용은 곧 그들의 지배체제를 일거에 붕괴시키는, 국가존망의 일대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반발하였다. 류큐의 평민층의 민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류큐 평민들은 각급학교에 운집하여 일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것을 촉구하는 대일본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슈리성의 민중들은 마쓰다가 머무는 숙소 앞에 시위를 벌이고 즉각 류큐땅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2개월에 걸친 지리한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한 마쓰다는 일단 빈손으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마쓰다가 귀국선에 오르자마자 류큐왕은 도쿄에 친서를 휴대한 특사단을 보낸다.
“류큐와 중국은 5백여 년에 걸쳐 서로 인연을 맺어 왔으며 신의로 연결되어 있어 그 인연을 끊기란 실로 어려운 일은 줄로 알며, 더구나 중국식 직제와 연호 및 의례 등을 일거에 폐지하고 귀 일본정부를 따르는 일이라는 실로 곤란한 줄 아뢰오.”
류큐의 특사들은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세 오쿠보를 만난 자리에서 만약 일본이 청나라와 직접 교섭하여 ‘마쓰다 10개조항’을 청나라가 승인한다면 류큐도 일본의 요구에 따를 것이라고 마지노선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오쿠보는 류큐가 일본의 판도라는 사실은 이미 청나라가 명시적 묵시적으로 승인하였는바, 류큐는 순전히 일본 내정문제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한편으로 일본은 류큐가 청나라에 직접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4세에 미국공사가 되어 이름을 떨친 외교관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즉 모든 류큐 주민이 청나라에 가려면 반드시 우선 일본정부에 신청하여 여행허가를 얻어야 하며, 사사로이 청나라를 여행하는 자는 극형으로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그해 일본정부는 류큐에 대한 관리를 외무성에서 내무부로 전환하는 등 류큐의 외교권과 사법권을 박탈하여 완전한 류큐병탄의 길을 닦아 놓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1905년,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을 강박하여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주요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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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必震, 胡新, [中琉關係史料與硏究], 北京: 海軍出版社,2010.
高之國,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일본인으론 못산다" 그들도 이준처럼 자결했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⑥-30년 터울,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류큐왕 밀사로 청 이홍장 찾아 파병요청…사실 알려지자 일본 병력급파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2.26 09:17:39)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1876년 일본정부는 모든 류큐 주민의 중국여행을 엄금하였다. 그해 12월 어느 날 밤, 오키나와 나하항의 후미진 부두 어귀에는 작은 어선 한 척이 닻을 올렸다. 어선에는 초라한 어부행색의 ‘특별한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3인의 밀사, 류큐 마지막 왕의 밀명을 받은 향덕굉(向德宏), 임세공(林世功), 채대정(蔡戴程)이었다.
어선의 항로는 희한했다. 이렇다 할 풍랑도 없었는데 처음에는 북동쪽 일본으로 향했다가 닷새쯤 되던 날, 선수를 반대편으로 슬그머니 돌려 남서쪽 중국으로 한 열흘간 항행하였다. 그렇게 어선은 닷새는 북동쪽으로, 열흘은 남서쪽으로 항행하길 반복했다.
어선은 이듬해, 1877년 4월에야 푸젠(福健·타이완의 맞은편에 위치한 중국 남동부의 성) 해안에 상륙하였다. 3인의 밀사는 하선하자마자 곧장 푸젠성 순무(巡撫·성 최고행정책임자)에게 류큐왕의 친서를 올렸다. 거기에는 류큐가 일본의 사실상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실정은 누락한 채 다만 일본이 류큐가 청나라에의 조공을 방해하고 있으니 청나라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푸젠성 순무는 6월 14일 마땅히 류큐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베이징 조정에 상신하였다.
류큐왕의 밀서를 받은 청나라 조정은 난감했다. 당시 청나라는 자국의 방위에도 힘겨웠다. 북으로는 러시아와의 영토갈등으로, 남으로는 월남문제로 인한 프랑스와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홍장을 수뇌로 한 양무파들은 평화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 하였다.
초기 양무파의 외교구상의 골간은 ‘연일항아(聯日抗俄)’ 즉 ‘일본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남침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이홍장은 미약한 중국의 해군력으로 류큐를 구하려는 것은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동중국해 바다 건너 조그만 섬들보다는 광활한 북쪽과 남쪽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 훨씬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청정부는 류큐에 원군을 파견하지 않기로 최종결정을 내렸다.
철석같이 믿었던 종주국의 ‘류큐 포기’라는 비보를 전해들은 향덕굉과 임세공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두 밀사는 머리를 삭발하고 탁발승으로 변장, 텐진을 향해 떠났다. 텐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이홍장의 관저 대문 앞에 꿇어 앉아 혈서를 썼다.
“류큐 신민들은 살아서도 일본인으로 살 수 없고, 죽어서도 일본의 귀신이 될 수 없다. 대청제국은 조속히 출병하여 류큐를 구해 달라.”
두 밀사는 며칠을 단식하며 빈사의 조국을 구해 달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간혹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지켜볼 뿐, 굳게 닫힌 이홍장 관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일주일째, 임세공은 남동쪽 머나먼 류큐 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 후 비수로 심장을 찔러 자결하였다.
류큐왕이 사신을 청나라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정부는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입안에 넣은 눈깔사탕 같은 섬나라를 목구멍 속으로 삼켜 완전한 자기 것으로 삭혀버려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879년 3월 27일, 일본정부는 내무대신 마쓰다에게 500여 명의 병력을 딸려 류큐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도성인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고 4월 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는 포고령을 전국에 포고하였다. 연이어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와 왕자들을 도쿄로 압송하였다.
1875년 류큐가 ‘마쓰다 10개항’으로 사실상 일본에 합병된 지 30년이 되던 해,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가 되었다.
1877년 류큐 상태왕의 3인의 밀사가 실패한지 역시 30년만인 1907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일제의 무력적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이를 막아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준은 현지에서 분사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일제에 역이용 당하여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류큐의 청나라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류큐를 완전히 병탄하였던 것처럼, 헤이그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반도를 병합하여 버렸다.
이처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류큐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공간(지리)에서 되풀이된 시간(역사)의 반복성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그 반복성의 색조가 지나치게 어두워 슬프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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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쓸모없고 바다는 막혀 중국은 비좁다<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⑦-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대륙 정책만 고집 외면했던 태평양 이제는 팽창주의 발톱 드러내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3.20 08:42:56)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단 한 점의 녹색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회색과 암갈색, 암황색 뿐.”
나는 실크로드 기행을 떠나는 중이었다. 중국 간쑤(甘肅)성 중심도시 란저우(蘭州) 공항에서 둔황의 모가오(莫高)석굴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 지방의 중소도시를 연결하는 여객기는 저속으로, 저공비행하는 습성을 알고 있는 나는 일부러 창가쪽에 자리를 잡았다.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눈으로 관측하는, 즉 조감(鳥瞰)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회색의 사막이 망망대해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무(無)를 연상시키는 회색이 주는 무료함의 모래사막지대를 건넜다 싶더니 암갈색의 암석사막지대가 전개되었다. 간간이 모래사막과 암석사막사이에 풍화된 암황색의 잔구가 섬처럼 스쳐 지나갔다.
청량음료수를 몇 잔씩 들이켰다. 갈증을 다스릴 수 없었다. 뭔지 모를 그 목마름의 원천은 뭘까. 나는 물줄기나 오아시스, 초원이나 산림지역을 굽어 살피고 싶었던 것이다. 녹색을 향한 갈증이었다. 녹색을 만나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무려 세 시간의 짧지 않는 비행을 마친 여객기가 둔황공황에 나래를 접을 때까지 단 한 점의 녹색도 볼 수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란저우- 둔황 간 약 1500㎞의 비행항로 주변지역에는 초원이나 산림은커녕 단 한 줄기의 내천이나 한 방울의 오아시스도 없는 이른바 ‘무인지대’였다.
국토면적이 넓어 별에별 지형이 많은 중국에서는 사막지역도 크게 넷으로 구분된다. 모래사막의‘사막’, 암석사막의‘고비’, 풍화된 건조한 구릉의‘풍화잔구(風化殘丘)’, 사막화가 진행중인 ‘사막화지역’ 등이다. 이러한 사막지역의 총면적은 2008년 현재 198.24만㎢로 중국 전체면적의 20.6%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면적(남한 면적의 약 20배)이다.
설상가상으로 근래 중국의 사막화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일로에 있다. 1980년대는 매년 제주도 넓이만 한 약 2천㎢의 사막화가 진행되더니 2000년대 들어와서는 충청북도 면적만한 7천여 ㎢의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비단 사막뿐만이 아니다. 아래 <중국지형도>를 살펴보라. 시장(西藏 티벳)과 칭하이(靑海)의 대부분, 스촨(四川)과 신장(新疆), 간쑤 일부지역은 보통 사람이 산소통없이는 호흡하기조차 곤란한 해발 3~7천m이상의 고산지대(중국 전체 면적의 약 5분의 1)이다.
중국은 저 남미대륙의 띠처럼 긴 칠레가 아니다. 동부해안지역의 번화한 도시가 중국대륙의 언뜻 기름지게 보이는 뱃가죽이라면 중서부 내륙의 피폐한 농촌은 아직도 간고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 중국의 뱃속이다. 내륙의 보통사람들에게는 아직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가 통용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고 있는 것은 중국은 땅도 넓고 물자도 풍부하다는 생각이다. 중국은 넓지만 비좁다. 한반도의 44배, 남한영토보다 96배나 넓은 960만㎢의 영토면적, 세계 3위의 중국은 얼핏 보면 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 땅은 13억 인구를 먹여살릴 만큼 물자가 풍부하지 않고, 특히 중국의 바다는 일본보다도 좁다. 미국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80%를 차지하나 중국에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불과 15%밖에 되지 않는다. 석유나 철광 등 지하자원도 미국이나 러시아의 20~30%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은 세계 경지가능 총면적 중 50분의 1을 점유할 뿐이다. 그런 중국이 인류의 5분의 1을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린다는 것은 참 용하다. 중국인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생존적지는 좁아 동부의 평야지대에 인구가 밀집해 있다. 상하이시의 도시지역만 하더라도 서울시의 8배 인구밀도로 1㎢당 약 4만명이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세계 5분의 1 인구가 세계의 50분의 1의 경작지에서 세계의 생활하기 적합한 생존적지의 7%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제아무리 중국의 힘이 커진다손 치더라도 지정학적 특성상 사막이나 고원이 대부분인 서쪽으로 나아가 보아야 별 볼이 없다. 결국 현대중국의 팽창욕구 주력방향은 동쪽의 바다로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누운 태평양
바다는 옆으로 퍼지기를 좋아하고 늘 움직인다. 바다는 자기확대를 좋아하고 자기 한정을 싫어한다. 바다는 도로라고는 따로 없고 바다 자체가 누구나 통할 수 있는 길이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마저도 경계선을 모르고 살고 있지 않은가. 바다는 활동하기 좋아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바다는 이 해안 저 해안에 부딪쳐 보기도 하고, 세계의 흐르는 물을 다 안아보는 것이다. 바다는 개방주의자요, 세계주의자인 것이다.
헤겔은 ‘바다는 정복과 무역을 위해 인류를 부른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바다의 여왕 태평양을 바로 곁에 두고서도, 그 여왕이 부르는 노래 ‘자유와 무역’을 중국인들은 악녀의 유혹으로 알았을까? 중국인의 눈에는 뭍이나 대륙만 보였지 바다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아담 스미스는 1776년에 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한 나라의 침체는 해외무역을 중시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으며, 쇄국은 반드시 자살로 향하게 된다'고 했다. 인류에게 있어 15세기는 매우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다. 인류는 뭍으로부터 바다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바다는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막론하고 뭍위에 사는 모든 인류들을 향해 넓은 가슴을 활짝 펼쳤다.
이 중요한 시기에 하필 명태조 주원장은 항해 금지령과 해안 봉쇄령을 반포했다. 그는 역대 중국왕조 창업자가 으레 그러하듯, 홍건적의 졸병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세계 최대 최강의 대제국이었던 몽골의 원을 몰아내고 다시 한족 중심의 중국을 건설했다. 국가의 정치이념은 관방적 유가사상과 쇄국정책으로 유럽과 교역을 차단하는 대신 중국대륙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완성을 이루었다. 이로 인하여 해안을 통해 실어 나르던 공물을 해적들로부터 지키던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해체시켰다.
중국은 거대한 영토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곡식과 물건만으로도 철저하게 자급자족이 이루어졌고 또한 강력한 전제적 정치력을 행사하기 위해, 무역을 통해 번 많은 돈을 가지고 세력을 행사하던 지방 토호들을 제압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단절하게 된다.
이와 같은 ‘금해(禁海)’정책은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고, 사회의 분업과 상품경제의 발전 및 자본주의 싹의 성장을 가로막은, 중국사에 있어서 가장 어리석은 자충수였다. 중국은 아시아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자 태평양을 누빌 수 있었던 역사적 선택의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오히려 태양을 다시 떠올리기 어렵게 태평양 연안에다 만리장성 아닌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돼지 앞에 진주라는 말이 연상되듯, 류큐라는 진주알 140여개를 일본에 고스란히 넘겨 주고 말았다. 중국과 태평양을 잇는 가교인 류큐를 중국은 바보처럼 자신이 꼰 새끼줄로 자신을 묶어 버렸다. 위대한 중국의 시대는 끝났다. 중국은 태평양을 영영 잃고 만 것이다. 태평양은 바다중의 바다요, 바다중의 황제이다. 바다는 본래 모든 생명의 고향이다. 지국의 돌변 속에서 일찍이 바다는 인류조상의 생명을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 보호하고 키워주었다. 그런 어머니의 바다. 태평양을 중국인은 외면하였다. 태평양 역시 중국을 외면하고 돌아누웠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주도하는 명실상부한 G2가 되려면 미국과 함께 태평양을 반분해야 하며, 우선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봉쇄하는 철책 기능을 하고 있는 류큐체인을 돌파해야 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인가. 지금 중국은 스스로 버리다시피했던 류큐를, 이미 13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굳어진 류큐군도 140개 섬과 해역을 몽땅 돌려달라고 한다.
힘이 좀 세졌다고 객기를 부리는 말로 여기며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기 시작하는데 있다. 개혁개방 초기 주로 국제무역과 경제관계를 통한 소프트 파워를 키워왔던 중국이 이제는 류큐 해역에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는 등 노골적인 무력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21세기 중화제국, 그 팽창주의의 야욕의 발톱이 류큐 해역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적나라하게.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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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을 못한 일본은 아시아의 왕따였다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⑧-그랜트의 류큐 3분안>
이홍장 만난 그랜트 "류큐로 인해 천하의 패권은 일본이 쥔다”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4.02 11:06:31)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1879년 4월 4일은 류큐 왕국이 숨을 거둔 날이자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다. 그날로부터 달포 반쯤 지난 뒤, 5월 27일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Ulysses Simson Grant, 1822 ~ 1885, 미국남북전쟁 때의 북군 총사령관, 대통령 재임기간 1869~1877)는 중국대륙의 텐진(天津)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고향 오하이오에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던 그랜트는 일본의 류큐병탄 소식을 접하자마자 센프란시스코행 미대륙횡단 열차를 잡아탔다. 그는 태평양과 아시아로 향하는 관문인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곧장 항구로 달려가 요코하마 경유 텐진행 태평양횡단 여객선에 노구를 실었다.
미대륙횡단열차에 이은 태평양횡단여객선 40여일의 긴 여정 끝에 텐진항에 도착한 그랜트는 여독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다음날 곧바로 청조정의 실세인 이홍장과 만나고 5월 30일에는 베이징으로 가서 공친왕을 예방하였다. 6월 12일 다시 텐진으로 돌아온 그랜트는 수행원 융(J.R. Young)과 부영사 페식(W.N. Pethic)을 대동하고 이홍장의 관저를 방문하였다.
이처럼 그랜트의 휘황한 동선(動線)에서 필자는 철인3종(바다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한사람이 쉬지 않고 실시하는 인간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이 오버랩 된다. 그 무엇이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마치 철인3종에 임하는 선수처럼 초강행군을 불사하게 만들었을까?
서부개척이 완료될 무렵 당시 미국 지도층은 태평양을 미국의‘내륙호’로 보았다. 그랜트는 일본의 류큐 병탄은 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에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향후 내륙호 서편에서 미국이 차지할 몫을 일본이 선점하도록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인은 미합중국의 현직 대통령 자격이 아니라 은퇴한 민간인의 신분으로 귀국을 방문했다. 류큐 처리 문제를 대인과 상의할 목적으로 태평양을 건너오게 되었다.”
동양의 노대국과 서양의 신흥강대국의 전 현직 정상이 처음으로 마주한 역사적 회담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류큐 ’였다.
“본 대청제국은 골치 아픈 여타 국내외문제들 때문에 류큐에는 미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그 섬들이 귀국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류큐군도는 미합중국의 국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비록 류큐는 작은 섬들로 구성 되어있지만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은 실로 크다. 류큐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패권은 귀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 원래 왜구의 소굴이나 매한가지인 섬나라 일본이 작은 섬 몇 개 더 얻었다고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된다니, 지나친 기우이다. 다만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류큐를 일본이 무력으로 병탄한 것은 미국의 체면을 손상한 것이다. 미국과 청국간에는 류큐해역을 통과하여 상하이로 도착하는 항로가 뚫려 있는데, 만일 청-일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귀국의 상선도 순조롭게 항행할 수 없을 것 같다. 각하가 류큐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있으면 알려 달라.”
그랜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내게 좋은 묘책이 있다. 류큐군도의 북부 아마미제도는 일본에게, 류큐의 중부(오키나와)는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일이 공동 관리하고, 류큐의 남부 미야코와 아에야마 제도는 귀국이 직접 통치하는 방안이다. 이는 청-일-류큐 3자에게 모두 좋은 묘안이라고 생각한다.”
이홍장은 그랜트의 묘책이 겨우 ‘류큐 3분안’이라는 사실에 약간 까칠하게 대꾸했다.
“류큐는 원래 명나라 초엽부터 지금까지 500년 동안 조공을 바쳐온 대청제국의 속방이다. 류큐의 국왕도 대청제국의 황제가 임명(이때 통역관은 이홍장이 말한 ‘책봉’을 ‘임명’이라고 통역)하여 왔다. 류큐 군도의 모든 섬들은 종주국인 우리 대청제국에 관할권이 있다.
그랜트는 이홍장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조공’,‘종주국’, ‘책봉’, ‘속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서양의 문화차이였다. “그럼 대청제국이 류큐왕을 임명해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종주국은 또 무언가? 속방과 식민지의 차이점은? 무수한 의문부호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기포처럼 떠올랐다.
난감해하는 그랜트의 표정에서 이홍장은 이쯤에서 고자세에서 저자세로 내려와야겠다고 작심하였다. 일본의 문호를 열게 한 나라가 미국이고 그랜트가 비록 전직대통령이지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속방인 류큐의 단 한 개의 섬도 일본에 할양해줄 수 없는 것이 대청제국의 철칙이다. 그러나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차선책으로 각하의 류큐3분안을 수락할 용의도 없지 않다. 각하는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릴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측을 설득해주길 부탁한다. ”
이토 히로부미의 ‘류큐2분안’
이홍장의 중재요청을 수락한 그랜트는 7월 4일(미국의 103주년 독립기념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7월 22일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 류큐 문제에 대한 중재에 나설 뜻이 있음을 표명했다. 이토오는 류큐 병합의 정당성을 극력 해명했다.
“류큐는 삼백년 동안 일본의 속국이었다. 류큐의 작은 섬들은 본래 일본 영역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류큐가 이전에 청에 조공을 바친 것은 류큐와 중국 간의 무역 형식의 일종일 뿐이지 종주국과 속국관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랜트는 8월 13일 이토에게는 류큐3분안을 최후의 중재안으로 제시하고, 이홍장에게는 서한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랜트는 서한에서 “청일 양국이 화평의 정신으로써 고위관료를 특사로 파견하여 협상할 것을 바란다. 본인은 간사한 어느 나라가 귀국이 쇠약해지는 것을 틈타 야욕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청일 양국의 불화로 인하여 서양제국이 어부지리를 취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청일 양국이 상호 양보의 정신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와 줄 것을 호소했다.
그 무렵 일본 조야에는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서구열강이 청나라에 군함과 무기를 지원하여 류큐에 대한 군사행동을 감행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괴담이 저녁안개처럼 퍼져있었다. 이듬해 3월 이토오는 청 정부에 그랜트의 류큐3분안을 변형한 ‘류큐2분안’을 제안하였다. 즉, 류큐군도의 북부와 중부는 일본이 지배하고 류큐군도의 남부는 청이 관할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그랜트에게 당초 류큐3분안에 근거하여 도쿄에 유폐 중인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에게 복위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가 오키나와의 척박한 땅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류큐2분안’으로 개정했다고 적당히 둘러대었다.
1880년 10월 20일, 류큐2분안을 핵심으로 하는 [류큐 수정조약 초안]이 작성되었고 이에 청의 총리아문대신 심계분(沈桂芬)과 일본측 협상대표 이토오가 서명하였다.
그 후, 청 조정은 이홍장에게 초안의 비준여부를 총괄 검토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홍장은 “일본인의 요구를 응한다면 응한 이상으로 손해를 보고, 거절하면 거절한 이상으로 보복 당하게 된다. 일본인에 대하여는 입장 표명을 최대한 늦추는 묵묵부답의 ‘무대응 지연책’이 최상책이다.”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렸다.
청 조정은 이홍장의 보고서를 채택, 초안에 서명을 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대응 지연책은 일본의 전체 류큐군도 병탄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무대책’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무대응 지연책은 국제법상으로도 ‘묵시적 승인’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
이홍장을 비롯한 당시 청 지도층이 최소한의 해양의식과 지정학적 사고능력, 국제법적 식견만 갖추었더라면 일본의 류큐병탄을 저지하기에는 무기력한 당시 자국의 현실을 감안하여 류큐2분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아주 간단하게, 역설적으로 국제법에 부합되게, 센카쿠를 포함한 류큐군도 남반부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출구를 상실해버렸다. 이렇게 부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류큐 왕국은 영영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렇게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체제는 결정적인 첫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화질서는 동심원, 대동아공영권은 피라미드
‘조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김에 한마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들‘조공’하면, ´상납´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공’을 사대주의의 징표라 하며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괜한 역사적 열등감에 빠져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남겨준 인식상의 오류이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다.
국경지역에 개설된 시장에서 행해지는 변경무역이나,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하고 국가에서 임명한 관납상인들에게 무역상품의 조달권을 독점하게 한 억상정책의 질곡을 뛰어넘는 거상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 [상도]에서나, 맹인 홀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인신공양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죽는 [심청전]에서 나오는 밀무역 등, 이러한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민간무역행태 이외에는 조공무역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무역형태의 주류는 조공무역이었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賜與)를 내린다.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몇 배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조공을 1년에 3번 바치던 것을 1년에 4번 바칠 것을 요청했으나 명은 월남처럼 3년에 1번만 바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명나라 멸망의 주요원인의 하나는 과도한 사여품의 방출로 인한 국고의 탕진이었다.
중국은 책봉 관계(상명하복관계가 아닌, 의례적인 외교형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중국적 조공질서의 동심원(<그림 1> 참조)안에 들어온 조선(매년3공)과 류큐(격년1공), 월남(3년1공)은 중국과 가장 밀접한 이너서클의 일원이었다.
이와 반면에 일본은 극히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제국 중에서 특히 조선과 비교하며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중화질서의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였던 유일한 나라인 것처럼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이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이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왜구(일본에서는 왜구를 주로‘민간무역업자’라고 미화하여 부른다)의 눈부신 활약(?)을 위시하여 류큐를 통한 중개무역, 네덜란드와의 교역 등으로 무역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조선, 류큐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주로‘왜(倭)’또는‘일역(日域)’으로 칭하여 왔다. 왜라고 부르는 밑바닥에는 일본을 왜구의 본거지로 폄하하는 어감이 배어 있었고, 일역이라 칭하는 이면에는 일본을 중국적 세계질서의 동심원내의 멤버로 함께하기에는 부적절한, ‘국가’로서의 자격에 미달하는‘지역’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었다. 자주독립의 역사를 자부하여온 일본은 사실상, 동아시아 국가사회에서의 아웃사이더 내지 왕따였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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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류큐의 명운, 윤봉길이 갈랐다<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⑨-루즈벨트와 장제스>
루스벨트의 류큐 복속 제안을 마다한 장제스의 속셈과 실책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4.16 10:55:13)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영웅사관이냐?, 민중사관이냐?, 내게 칼로 두부를 자르듯 일도양단식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 택일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극소수의 영웅과 그 시대를 살아간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합작품이다. 영웅과 민중은 상호모순 대립보다는 상호보완과 조화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시의 카이로회담, 한국과 류큐의 엇갈린 운명에 관한 대목에서는 자꾸만 영웅사관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 등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전후질서를 구상하며 합의를 이루었다. 여기서 3대국은 일본의 영토제한과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제의하였고 특히 한국의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회담으로 특징된다.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이후로 일본이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한다.
2. 만주, 타이완, 펑후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하여야 하고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모든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3. 한국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제가 통치하였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지역들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만주, 타이완 등의 식민지는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잊혀진 왕국이 되어 버렸다. 사실 카이로회담은 류큐왕국이 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연합국측은 유럽전쟁에 주력을 쏟고 있었고 아직 류큐는 미국의 점령하가 아니라 일본의 수중에 놓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왜 장제스는 일본의 태평양 도서의 주권박탈 기산점을 1879년이라 하지 않고 1914년이라 하였는가.
2. 왜 장제스는 류큐를 만주, 타이완, 펑후도에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3.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이나 원상회복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는 필자가 19년 전에 제기하였던 의문들이었다(졸저, 동양스승 서양제자, 1992).
근래 공개된 카이로 회담 회의록과 장제스의 일기(미국 스텐포드대학 후버연구소 보존)를 참조하여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한다.
루스벨트, ‘류큐를 통째로 중국에게 주겠다.’
미-중 양국간의 첫 정상회담은 11월 23일 오후 7시경에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왕총훼이(王總惠)국방위원회 비서장을 대동하고 루스벨트의 숙소로 건너갔다. 두 정상은 주로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처리문제를 숙의하였다. 시침이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루스벨트의 입에서 졸음을 확 깨는 말이 튀어 나왔다.
"류큐는 일본에 의해 불법강점당한 활모양의 호형(弧形) 군도이다. 마땅히 탈환되어야 한다. 류큐는 중국과 지리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각하가 원한다면 류큐 군도 전부를 중국에 넘겨주겠다."
루스벨트의 ‘통큰 제안’에 장제스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였다.
“류큐는 우선 미국과 중국이 공동관리한 후, 국제신탁통치에 위탁하여 관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틀 후인 11월 25일에 재개된 미-중 양자회담에서 루스벨트는 류큐를 다시 거론하였다.
“류큐의 미래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타이완에서 규슈까지 서태평양을 둘로 가르는 류큐는 중국의 안보방파제이다. 그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중국이 타이완만 탈환하고 류큐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타이완은 물론 중국본토의 안보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처럼 중요한 류큐를 침략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의 손아귀에 놓아둘 수 없다. 본인은 아무래도 류큐를 타이완과 펑후열도와 함께 귀국이 관할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장제스의 침묵이 답답하였는지 루스벨트는 간략 명료한 어조로 말하였다.
“각하가 원한다면 전쟁이 끝난 후 류큐를 중국에 주겠다.”
"류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아무래도 류큐는 중미 양국이 공동 신탁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장제스의 불가사의한 우답에 루스벨트는 두 번 다시 류큐를 거론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왜 류큐를 마다했는가
장제스는 왜, 무엇 때문에 카이로에서 루스벨트가 거저 주겠다는 류큐 군도를 마다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중국과 대만, 홍콩 등 중화권의 전문가들은 저마다 분분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중국측 입장으로서는 역사의 비디오 테이프라는게 있다면 그것을 앞으로 되돌려 교정하고 싶은, 참으로 아쉬운 장면인가, 장제스에 대한 원망과 비판 일색이다. 그 중 중요한 것 셋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제스의 가슴속에는 만주(동북)와 타이완만 있었고 류큐는 없었다. 더구나 장제스는 루스벨트가 류큐를 거론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류큐에 대한 사전준비가 전혀 없었다.
둘째, 장제스의 머릿속에는 일본보다는 중국공산당을 궤멸하는 책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의 전문가들은 “이 전쟁이 끝나면 마오쩌둥 일당 제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혹시 일본의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런데 류큐를 차지하여 일본에 척을 지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다”라고 마치 장제스의 머릿속을 들어가 보기라도 한 듯이 목청을 돋운다.
특히 중국대륙측 일각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장제스가 청년시절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력을 들면서 그가 겉으로만 ‘항일’이지 ‘골수 친일파’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장제스가 항일전쟁을 하게 된 계기마저도 시안(西安)사태라는 감금된 상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하여 ‘울며 겨자 먹기’ 시작한 것이라고 악담에 가까운 인신공격성 비난을 퍼붓고 있다.
셋째,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발언이 중국의 류큐에 대한 영토야욕의 유무를 떠보는, 페인트모션의 일종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류큐 왕국이 독립국이었다는 역사를 잘 알고 있을 루스벨트가 류큐를 송두리째 중국에 거저 주겠다니, 거기에는 반드시 내밀한 흉계가 숨어있다고 지레짐작하여 그처럼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는 분석이다.
장제스를 위한 변명과 해양의식의 미흡
필자는 위의 지적들을 조목조목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장제스가 류큐문제에 대해 미처 준비를 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장제스는 1943년 11월 15일 일기에 이렇게 다짐한다. “류큐와 타이완은 서로 다른 자위에 있다. 류큐는 독립왕국이며 그 지위는 한국과 대등하다. 나는 류큐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즉 장제스는 류큐는 미중 공동신탁통치로, 한국은 자주독립을 제안하기로 카이로 회담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다음은 장제스가 ‘항일’보다는 ‘반공’에 힘썼다는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류큐의 귀속문제와는 별 상관없는 부분이다. 장제스가 자본계급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공산당을 적대시하고 공산당 궤멸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일전쟁 기간동안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일본군에 총력을 기울여 맞대응하다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그와 반면에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허허실실의 유격전을 구사하면서 암암리에 공산군의 전력향상에 힘썼다. 이는 장비와 병력에 있어서 공산당을 압도하였던 국민당 군이 국공내전에 연전연패하고 결국 타이완으로 패퇴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세 번째 지적에 대한 것으로,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진의 파악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통큰 제안’에 중-미 공동신탁 통치안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었다. 류큐의 완전한 독립 회복을 요구했어야 했다.
동시에 일본이 탈취한 영토회복의 기산점을 1914년에서 1879년으로의 소급을 제안하였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중국의 영토팽창욕구에 대한 서방세계의 의구심도 불식시켰을 뿐만 아니라‘일본 점령지의 해방’이라는 카이로회담의 종지와도 부합되는 양수겸장의 카드로 작용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래도 여전히 중국측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원망과 후회, 탄식이 남는다. 장제스가 평소 그답지 않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였을까?, 이에 필자는 기존의 중국의 전문가들이 언급하지 않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 단 한 가지만 들고자 한다.
한마디로 해양의식의 미흡이다. 장제스는 대부분의 중국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박약했다. 중국에서 물고기라면 으레 강과 호수에서 사는 담수어를 의미할 만큼 바다의 쓸모는 기껏해야 소금을 생산하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아니, 소금마저도 바위소금(암염), 소금우물(염정)에서 상당부분 충당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다와 완전히 담을 쌓고도 살아도 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 지속된 금해(禁海)정책으로 바닷가는 왜구의 침략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 귀족은 물론 평민도 살기에 부적격한 위험지대로 여겨졌다. 당연히 장제스는 류큐군도가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를 읽지 못하였다. 또 당연히 장제스는 공산당 치하의 화북지방과 만주지방의 육지영토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끝으로 가장 궁극적이며 현실적인 문제, 왜 한국은 독립하였는데 류큐는 일본의 일부로 남게 된 걸까? 한국과 류큐 둘 다 중국과 실리호혜의 조공관계에 있었지만, 엄연한 자주독립국이었다. 그런데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 또는 중국영토화를 마다하고 한국의 독립만을 주장했을까?
실제로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은 한국에 대해 미-영-중 3국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였으나 장제스는 이를 일축하는 대신 한국의 독립의 약속을 선언에 발표하자고하여 기습적으로 제안하여 관철시켰다. 누구 때문이었을까? 무엇 때문이었을까? 딱 한 사람만, 딱 한 사건만 들라면, 역사는 명쾌히 대답할 것이다. 그 누구는 한국의 청년 윤봉길(1908-1932)이고, 그 무엇은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1932.4.29.)라고.
장제스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를 일컬어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다. 윤봉길 의거 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할 일없는 망명객들이 내부투쟁이나 일삼는 파락호집단으로 쯤으로 여기고 한 푼도 돕지 않았었다.
그런데 수통 폭탄 한방으로 일본 침략군 사령부 이동체를 일거에 섬멸한 윤봉길의 쾌거를 접하고서야 장제스는 물심양면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다. 반면에 류큐인은 류큐의 독립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일찍이 일본에 병합된 그만큼 일본에 의해 완전히 순치되었는지, 독립의지와 그 실천이 너무나 미약하고 미미했다.
카이로 회담전인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첫날인 11월 22일, 그의 일기에 ‘종전후 한국의 완전 독립과 자유의 건의 예정’이란 자구를 명기하기까지 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인 이승만도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최대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 답은 윤봉길이다. 한국은 윤봉길이 있었기 때문에 광복을 성취했고, 류큐는 윤봉길 같은 항일독립영웅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표1>참조).
심난했던 동북아의 창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의거를 감행한 윤봉길 의사의 24년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의거가 항일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위에 대한민국이 섰다.
<참고문헌>
강효백, ‘윤봉길의사 연행시 사진진위 문제(논문)’, 서울: [중국학연구],제2권-제1호, 2001. 11.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은 일본’, [동양스승, 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의열투쟁과 한국독립운동], 서울: 국학자료원, 2003.
胡德坤, [戰時中國對日本政策硏究],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0.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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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대국은 중국 수천년 팽창야욕의 종결자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⑩-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모택동은 내륙확장, 등소평은 해외진출, 강택민은 내륙개발...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4.30 11:24:00)
공산주의가 어떤 몰골로 남아 있을까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 대국 중화인민공화국에 가 보았더니
공산주의 세 떨기 붉은 꽃
프롤레타리아독재, 계급투쟁, 폭력혁명은 다 지고 없고
그들의 노랫가락 속에는 옛날 것만 남았더라
중화사상, 천하통일, 실용주의만 남았더라
그것도 돈독만 잔뜩 올라 남았더라.
- 강효백
중화사상은 무엇인가
중화사상은 천하통일, 실용주의와 함께 반만년 중국의 시공을 일관하는 가장 뚜렷한 흐름이고 원동력이자 중국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빠뜨려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중화사상은 한마디로 중국이 원형(圓形)의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자존심 충만한 세계관이다. 원래 자존심이란 배타도 교만도 아니다. 자존심은 자기 확립이고 자기 강조다. ‘나’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강력한 신념, 그것이 곧 자존심이다. 위대한 개인, 위대한 국가와 민족이 필경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자존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이 상대의 도를 넘어 독선으로 치닫고 자존을 균형잡아 주는 겸허를 잃은 순간 자존은 교만으로 변해버린다.
중화사상도 다른 각도로 뒤집어 보면, 자신만이 전세계의 중심이라는 과대망상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중화라 부르고 주변 이민족들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송두리째 열등한 오랑캐로 경시해온 중국인의 혈맥 깊은 곳에는 교만성이 잠재하고 있다.
중국, 중국인은 짧게 잡으면 일본이 류큐를 합병하여 중화질서에 첫 균열이 가기 시작한 1879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까지, 길게 잡으면 아편전쟁에 무참히 패배한 1840년부터 20세기 말엽까지, 약 70~150여 년간을 제외하고는 자존심과 교만성이 매우 강한 국가, 민족이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국가‘중국(中國)’을 이루었던 8세기 무렵 당나라 시대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중화사상은 엄밀히 말하자면 다민족국가사회의 융합을 위해 무한히 확대재생산이 필요한 자아도취성 이데올로기다.
모래시계 또는‘역(逆)’Z형이라 할까. 중화사상을 불멸의 국가융합에너지로 삼아 찬란한 중화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현대중국은 지역개발전략과 대외정책의 주력방향을 연계하여 전환시키는 특유의 궤적을 보여 왔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서남방의 내륙 확장에, 제2세대 덩샤오핑((鄧小平)은 동남방의 해외 진출에, 제3세대 장쩌민(江澤民)은 서북방의 내륙 개발에 주력했다면 지금 후진타오(胡錦濤)를 비롯한 제4세대 지도층은 동북방의 진출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중국의 제5세대 지도층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인가?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인민복을 입은 공산황제, 마오쩌뚱의 지역개발전략의 기본 이론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식 계획경제 이론에 입각한,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균부론(均富論)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중국인민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균빈론(均貧論)’이 되어버렸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식 계획경제이론 자체가 ‘균빈론’의 숙명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대외전략 기조는 군사력을 앞세운 전방위적 팽창주의였다. 마오는 측근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6.25전쟁에 인해전술의 대군을 파병하여 광활하고 윤택한 동북(만주)을 차지하였다. 덤으로 마오의 일생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정적인, 동북왕 가오강(高崗)을 숙청하고 북한지역을 세력권 하에 두었다.
그런 후 마오는 서남방의 영역 확장에 눈독을 들였다. 일찍이 국민당군에 쫓기며 서남부의 17개성의 18개의 산맥과 준령을 넘은 2만 5천리 대장정시절에 품었던 야심 때문이었을까. 1959년, 마오는 티베트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복속시켰다. 중국 전체 면적의 8분의 1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마오는 멈추지 않았다. 서남방 더 먼 곳으로 여세를 몰아붙였다. 1962년 10월 인도를 침공하였다.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온 중국군은 3천명의 인도군을 사살하고 4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적을 세웠다. 서남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확보한 것에 만족하고 퇴각하였다.
마오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도 일격을 가했다. 1969년 3월 우수리 강, 강 가운데 섬인 다만스키(중국명 珍寶島·전바오도)에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대규모 군사 충돌로 이어졌으나 핵전쟁 발발을 우려한 양국 지도자들의 회담으로 분쟁은 봉합되었다.
1974년 1월 중국은 돌연 남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북베트남(월맹)의 서사(西沙·Paracels) 군도를 점령하여 하이난다오(海南島)로 편입시켰다.
웬일로, 중국이 해양과 바다의 섬에도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일수교와 닉슨 미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있은 지 2년 후, 마오가 사망하기 2년 전의 일이다.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마오쩌둥의 비판적 후계자 덩샤오핑은 서남방에서 동남방으로, 닫힌 뭍의 내륙에서 열린 물의 바다로 나아갔다. 덩은 집권 이듬해인 1979년 2월 동남쪽의 베트남을 총 2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침공하였다. 그러나 중국침략군은 개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약 4만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다. 세계최강의 미국을 패퇴시킨 통일 베트남의 저력을 얕보았던 것이다.
덩은 베트남에게 교훈을 준 이른바 ‘교훈전쟁’이라고 자위했으나 대국으로서 체면을 구긴 사실상의 패전이었다. 기실 교훈의 수혜국은 베트남 보다는 중국이었다. ‘교훈전쟁’에 큰 충격을 받은 덩샤오핑은 그 후부터는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하는 내실우선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전쟁 이후 중국 대외정책의 중심도 “칼날의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자”의 도광양회(韜光養晦)로 수렴되었다. 덩은 동남부지역의 발전을 내륙지역으로의 파급효과를 기대하는 선부론(先富論)을 내걸었다. 마오의 균부론이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균빈론이었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의 바다에 동남부 3개성에 5개의 자본주의 섬, 즉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하이난 등 경제특구를 설립하였다.
덩샤오핑은 1984년과 1987년, 각각 절묘한 홍콩, 마카오 흡수 통치이론인 ‘일국양제(一國兩制)’로써 중국-영국 공동성명과 중국-포르투칼 공동성명을 체결하였다. 중국이 용이라면 여의주로 비견되는 홍콩을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반환받는 위업을 거두었다.
또한 중국은 1988년 3월, 남사(南沙·Spratlys)군도 7개 섬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1992년 중국 영해법으로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 1988년, 일본의 극우단체인 ‘일본청년사’가 류큐군도의 최남단 센카쿠에 등대를 설치하여 일본의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려는 행위에 대해 중국은 민간 차원에서, 그러나 조직적인 일본 규탄시위 및 항의를 하게끔 조정하였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그의 집권기간 내내 동남방의 바다를 향하여 일관된 정향성을 유지하였다.
제3세대, 서북방 국경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와중에 집권한 장쩌민은 열린 물의 바다가 부담스러웠던지 다시 닫힌 뭍의 내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북방 내륙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부익분 빈익부, 양극화의 선부론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지역간 균형발전의 ´신균부론’에 입각한 ‘서부대개발’을 내세웠다.
서부대개발의 핵심은 낙후한 서북지역의 위구르 자치구를 비롯한 소수민족밀집지역의 불만을 완화하고 사회 안정과 국경 방위를 위한 것이었다. 1996년 장쩌민은 서북 국경과 인접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국가원수들을 상하이에 불러내어 상하이-5 회담을 주도하였다. ‘서북 국경지대 군사부문 신뢰강화에 관한 협정´과 ´국경지역 군대감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회담은 2001년 우크라이나를 포함시킨 ‘상하이 협력기구’(SCO)로 확대 개편하였다. 중국의 지명을 딴 첫 국제조직을 국제무대에 등장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장쩌민이 심어둔 서북확장의 묘목은 어느새 자라나 최근 10년 새 중국은 러시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과 경계를 확정하며 3천여 ㎢ 영토를 새롭게 획득하는 등 서북국경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고 있다.
제4세대,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내다
장쩌민의 동향 후배로 2003년 집권한 후진타오는 서북에서 동북으로 방향을 확 틀었다. 망막한 사막과 설산지대로 꽉 막혀있는 중국의 서부는 젖과 꿀이 철철 넘치는 미국의 서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외적으로 “평화적으로 강대국으로 우뚝 선다”는 화평굴기(和平崛起)의 기치를 들었다. 화평굴기의 본질은 ‘평화’라는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주의’이다.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던 중국의 대외정책이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적극적 공격적인 정책으로 변화하였다. 중국의 대외정책 기조가 수렴의 제2, 제3세대와 달리 팽창의 제1세대로 복귀한 것이다. 특히 동북아지역은 중국이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지역질서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가장 우선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6자회담장을 마련하고 중국은 의장국으로 등극하였다. 장쩌민 시대의 상하이협력기구가 ‘서북6자회담’이라면 후진타오 시대의 북핵6자회담은 ‘동북6자회담’이라고나 할까.
후진타오는 국내적으로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 균형발전전략의 틀을 수립하고 동북3성의 인프라를 개발하는 동북진흥전략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동북3성의 고구려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역사왜곡작업의 일환인 동북공정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북진흥과 동북공정이 팽창의 대외정책, 화평굴기와 맞물리며 원래의 지역경제발전이나 역사왜곡의 수세적 범위를 뛰어넘어 한반도까지 공세적 차원으로 전환되고 있다. 북한의 존재가치를 중국에 대한 안보 위협을 줄여주는 완충지대에서 중국모델의 이식과 팽창욕구해소의 최전선으로 변환시키려는 동향은 후진타오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도드라지고 있다.
제5세대, 중국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내년 가을에 출범할 중국 제5세대 최고 지도층의 대외정책주력방향은 어디로 방향을 틀 것인가? 포스트 후진타오-원자바오 팀을 이어 중국을 이끌 시진핑-리커창 팀은 육해(陸海) 양면으로,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여는’계왕개래(繼往開來)로 나아갈 것으로 예견된다.
육지 쪽으로는 동북지향의 제4세대를 계승하여 북한으로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제5세대는 ‘동북3성 개발’이라는 지역개발전략을 넘어 ‘북한의 동북4성화’라는 대외확장노선으로 전환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북한에 많은 자원을 장기적으로 계약해서 탄광개발권, 동해 어업권 등을 확보한데 이어 2009년 나진항을 50년 조차를 해두었다.
베이징-단둥 고속철도를 비롯하여 동북3성 내의 교통 통신 발전소 항만 등 인프라구축 준공시한이 제4세대 집권 마지막 해인 2012년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단둥-평양, 단둥-원산, 투먼-나선, 창바이-김책 등 동북3성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한땅을 땀땀이 꿰매 내려가는 고속도로와 철도건설 준공시한은 제5세대 집권 기간 중으로 맞춰 놓고 있다.
한편으로 제5세대는 해양대국화에 몰입할 것이다. 그들은 덩샤오핑 시대의 해양진출유업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남서군도 뿐만 아니라 류큐 해역으로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 9월 7일,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상순시선이 충돌하면서 중일 간 심각한 외교 분쟁이 벌어졌다. 일본이 저자세에 가까운 타협안을 내놓아 미봉되었으나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대규모 반일 시위를 벌였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환치우시바오>(環球時報)를 비롯한 중국 각종 언론매체에는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의 독립 또는 중국에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특집기사와 칼럼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년 11월 16일 일본의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아사히 TV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중국해군이 노리는 것은 센카쿠뿐만 아니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류큐 군도 전체이다”라고 입을 모아 성토했다. 니시오간지(西尾 幹二)와 같은 극우파 인사는 “중국은 언제라도 류큐를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런 중국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라고 공언하고 있다.<계속>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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