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의 투자노트]주가 왜곡 우려…‘충격없이 팔 수 있을까’ - 외국인 매도세는 절묘한 타이밍…
매집 의도 판단 기준은 시장 컨센서스 한경비즈니스 2007-12-28
어지간히 정보에 무심한 투자자들도 ‘매집’이라는 말에는 한번쯤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시장에서 말하는 매집은 문자 그대로 주식을 팔기보다는 계속 사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마뜩치 않다. 만약 ‘매집’의 정의가 주식을 팔지 않고 사기만 하는 것이라면 어지간한 장기 투자자는 모두 매집을 하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 ‘매집’이란 좀 교묘하고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단 특정 회사 주식을 다른 주식보다 비대칭적으로 많이 사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특정 투자자가 코스피 200 종목 안에서 단 한 개의 종목만을 찍어서, 소위 ‘골라서 팬다’면 그는 이 종목을 매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매집은 또 지속적인 매수 행위를 가리킨다. 자신이 보유한 자산의 전부를 단 한 개의 종목에 투자하더라도 그 종목을 한 번에 사들이는 것은 매집이라기보다 ‘몰빵’에 가까운 개념이 된다. 하지만 열 번, 혹은 스무 번에 나누어서 특정 종목만을 사들이든지, 아니면 돈이 생길 때마다 해당 주식을 계속 사들인다면 그것은 ‘매집’의 의미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매집이란 ‘분할 매수로, 특정 주식에 비중을 과도하게 가져가는 매수 행위’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매집 주체 따라 파급 효과 다양
그런데 이런 ‘매집’ 행위는 그 주체가 누구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에 따라 여러 가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범한 개인 투자자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특정 기업의 실적을 확신하고 자금이 생길 때마다 그 종목을 매집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지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나 소신 없이 단순히 한 개의 종목을 매집하느라 여유 자산을 모두 쏟아 붓고 있다면 그는 대단히 위험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주식을 매집하는 주체가 평범한 개인의 소신이 아니라면 내용은 좀 심각해진다. 즉, 소위 ‘슈퍼 개미’라고 불리는 자산가가 특정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매집했다고 가정하자. 이때 그는 증권 거래법상 자신의 지분 매집이 경영권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 투자 목적인지 밝혀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증권시장 보호를 위해 만든 공시제도는 원치 않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가령 주식 매집이 ‘100% 순수한 목적’이었다고 가정하자. 이때 이 개인 자산가의 주식 매집은 굳이 마코비츠의 ‘자산 배분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만 그의 선택은 해당 기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그는 난관에 부닥친다. 소위 슈퍼 개미의 출현 소식은 공시를 통해 실시간으로 알려지고, 이 순간부터 그는 해당 주식을 더욱 비싸게 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100% 순수한 목적으로 해당 기업의 주식을 매집하려고 한 것이라면 그가 치러야 할 비용은 그야말로 만만치 않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그가 만약 불순한 목적(사실 주식시장에서 불순한 목적의 정의는 모호하지만)으로 매집을 시작했다면, 그는 이 순간부터 해당 주식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고작 5%의 지분을 확보했을 뿐이지만, 마치 20%까지 지분을 늘릴 것처럼 허세를 부릴 수도 있고 매집의 목적을 ‘경영권 참가’로 적어 냄으로써 해당 기업이 마치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충분한 이익을 취한 다음 ‘단순 보유’로 목적을 변경하고 다시 팔고 나가면 그만이다.
이때 그의 의도를 소위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 심정적 판단 기준이 있다면 바로 ‘컨센서스’다. 예컨대 해당 기업을 매집할만한 이유가 인정되면(가령 실적이나, 신규 사업, 지배 구조, 자산 가치 등) 시장은 그의 안목을 칭찬하겠지만, 반대로 그 판단이 시장 참여자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는 ‘불온한’ 인물로 낙인이 찍히고 금융 당국으로부터도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매집 주체가 기관투자가라면, 그것도 거대 기관투자가나 외국계 펀드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비근한 예로 헤르메스의 삼성물산 주가 조작 사건 같은 것도 이에 해당한다. 물론 여기에 ‘거짓말 공시’라는 결정적 허점이 하나 더 있기는 하지만 오십보백보일 뿐이다.
어쨌거나 이 경우에는 금융 당국이 감시와 처벌을 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개인이라면 그 범의가 비교적 명백하고 실제 자금의 흐름도 쉽게 손에 잡히지만, 판단의 주체가 개인이 아닌 시스템으로 구성된 기관투자가의 경우에는 수법도 교묘하고 실제 그러한 행위를 두고 ‘범의’라는 가치 판단을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사실은 스스로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실은 ‘통정 매매’ ‘허수 주문’과 같은 노골적인 위법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관투자가에 의한 주가 조작이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상당히 크다. 다만 그것을 개인이 하면 불륜이고, 기관이 하면 로맨스일 뿐 피차 만나서는 곤란한 상대를 만난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사자’와 ‘팔자’의 기묘한 화음
그런 관점에서 외국인들의 한국 주식 매집과 이익 실현은 국내 기관투자가들에게 좋은 학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필자는 오랫동안 ‘장기 공개 매집(10년간 한국 주식에 대한 외국인의 공개적인 장기 매집) 후 적절한 이익 실현의 타이밍은 언제인가?’라는 주제에 천착해 왔는데, 필자의 기준에서 보면 최근 외국인의 주식 매도는 적절한 시점에서 절묘하게 이익을 실현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한 시장 지분의 거의 절반을 공개적으로 매수한 주체는 그 시점이 언제라도 자신이 팔기 시작하는 순간 시장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단일한 주체가 공개적으로 주식을 매집할 경우 매도의 시점은 쉽게 오지 않는다. 즉, 그 시점은 매집자가 주식을 공개적으로 처분해도 매수 대기자들이 해당 주식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는 시점뿐인데, 그 시점까지 매집한 지분을 보유하고 관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시점이 오면 매집자는 과감하게 지분을 털고 나가도 평균 매도 단가가 하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마치 물이 비등점인 100도에서 끓듯, 매집 주식의 매도도 그 지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버린의 SK 지분 매도와 같은 흐름은 마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장인의 그것처럼 예술의 경지를 보여준 것이고 지금 이뤄지고 있는 외국인 매도도 마찬가지다.
금융 위기는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심각하지만 외국인 매도세가 국내 시장에 유별나게 강한 것은 국내 시장의 유동성이 특히 좋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망발에 불과하다. 외국인의 매도는 이미 2006년부터 시작됐고 그 규모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을 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외국인은 우리가 받아내는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매도의 적기로 여기고, 우리는 시장의 저평가에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 물량을 당당하게 받아내는 것뿐이다. 즉, 우리가 외국인 매도에 이 정도라도 견디는 것은 우리 스스로 추가 상승에 대한 확신의 강도가 크기 때문이다. 외국인(공개 매집자)의 입장에서는 시장의 추가 상승·하락에 대한 전망과는 전혀 관계없이 매집된 지분을 높은 매도 단가에 팔 수 있는 강한 호기가 되기 때문에, 지금의 장세는 양자의 입장 차이가 만든 ‘강우전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우리나라 일부 기관투자가의 지나친 불균형 매집 행위가 나중에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도 최근 필자의 관심사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 2006년 1차 매집자의 손에서 2차 매집자의 손으로 서서히 넘어간 주식들은 평균 매수 단가의 입장에서는 전자에 비해 후자가 훨씬 비싼 평균 매수 단가를 지불했을 터이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 당당하게 공개 매집을 감행한(그 결과 기관투자가들의 펀드 포트폴리오에 주가수익률이 200배가 넘는 종목들이 속출했다) 2차 매집자들이 평균 매도 단가를 낮추지 않고 그 주식을 무사히 처리하는 기술을 어떻게 발휘할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 상황이 윈-윈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느 시점에는 지금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지수 상승을 기록해야 할 터인데, 그때가 언제일지 참으로 궁금해진다(다만 그때 본의 아니게 3차 매집자가 되는 측의 끔찍한 운명을 여기서는 상상하지 말자).
‘시골의사’ 박경철
현직 외과의사이자 국내 최고의 투자전문가로 꼽힌다. 본명보다 ‘시골의사’란 필명으로 유명하다. 투자 분석으로 영리 활동을 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전문가다. 명쾌한 논리와 유려한 문장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주식일반 > 박경철(주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스권 장세 투자심리 파악 ‘길잡이’ (0)
2008.04.23
다우이론과 시장의 향배 (0)
2008.04.22
안정성·수익성 두 마리 토끼 사냥법 (0)
2008.04.16
재무제표 쉽게 보는 법 ① (0)
2008.04.16
주가순자산배율의 유용성 (0)
2008.04.15